김영석은 그의 생애에 대한 자료가 빈곤하여 전기적 사실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지면을 통해 그의 이름을 최초로 접할 수 있는 것은 1937년 『동아일보』에 발표한 평론 「조선시(朝鮮詩)의 편영(片影)」에서부터이다. 그의 창작 활동은 1938년「비둘기의 유혹(誘惑)」이 『동아일보』 주최 신인문학콩쿨에 당선되면서 시작하였다.
이후 1939년 10월 24일부터 11월 26일까지「춘엽부인(春葉夫人)」이라는 작품을 연재하였고 유진오(兪鎭五)의 추천으로 『인문평론』에 「월급날 일어난 일들」(1940)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가로서 활동하였다.
그후 광복 전까지 「형제」(1941)·「신혼(新婚)」(1941)·「상인」(1942)·「좀」(1943) 등 4편의 소설을 발표하였다. 광복 후의 작품으로는 「혜란의 수기」·「코」·「지게꾼」·「금전문제」·「전차운전수」·「지하로 뚫린 길」·「가방」·「폭풍」(이상 1946년)과 장편소설 「격랑(激浪)」(1948)이 있다.
「전차운전수」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와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과의 갈등 속에서 노동자들의 의식 양상의 흐름과 노동운동의 필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지하로 뚫린 길」은 노동자의 민족 해방을 위한 투쟁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또한 「폭풍」을 통해 노동운동에 적극적인 주인공(귀득)이 파업에 동참하여 나가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고 광복기 주요 이론가로 많은 평론을 발표하였는데 그의 평론은 해방기 좌파문학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주요 평론으로는 「문예의 대중화문제-기타」(1946)·「민족문학론」(1947)·「문학옹호를 위한 투쟁」(1948) 등이 있다. 그는 문예대중화운동의 일환으로 문화써클운동을 최초로 이론화하였다.
그리고 「민족문학론」을 통해 ‘우리가 수립하려는 민족문학은 오늘날의 특권적, 금융자본가적 내용을 품은 이른바 민족주의문학과는 전혀 다르다.’고 정의하면서 민족문화의 성격을 인민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밖에 1950년 이후 북한에서 발표된 소설들로 「화식병」(1951)·「승리」(1952)·「젊은 용사들」(1954)·「원쑤를 잊지말라」(1957)·「지휘관」(1958)·「고지에로」(1962)·「폭풍의 력사」(196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