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본명은 조영은(曺泳恩). 전라남도 영광 출신.
일찍이 도쿄에 건너가 고학하였으며, 같은 고장 출신의 시조 시인 조운(曺雲)에게 시조문학을 사사(師事)하였다. 1939년 이병기(李秉岐)로부터 『문장(文章)』지에 시조 「창」을 추천 받아 등단하고, 곧이어 194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로 1등 당선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 자주 조선문학가동맹측에 드나들다가 6·25전쟁 무렵 월북한 것으로 보인다. 광복 이후 남한에서 『조남령 시조집(曺南嶺時調集)』을 펴낸 바 있다. 작품으로는 수십 편의 시조와 약간의 소설 및 여러 편의 평론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일제강점기 말기에 해당하는 1940년대 초엽부터 고른 분포를 보이다가 광복 후 왕성한 활동을 보인다.
시조는 첫 추천작에 이어서 「향수」(문장, 1939.12.)·「봄」(문장, 1940.5.)·「노호(蘆湖)」·「구악(駒岳)」(문장, 1940.10.)·「바람처럼」(춘추, 1941.11.)·「석굴암」(춘추, 1943.10∼1944.3.) 등이 그것이다.
이어서 광복 이후에 「북악산 산바람 불어내린 날」(학병, 1946.3.)·「영릉(英陵)」(한글, 1946.10.)·「나의 눈물 나의 자랑」(문학, 1947.4.)·「트루먼 대통령에게」(신조선, 1947.6.)·「내가 사랑하려는 것은」(신천지, 1947.7.) 등을 발표하였다.
그의 시조는 대체로 곤궁한 시대를 살아오는 서민들의 가난과 민족적 현실을 서정적 언어로서 사실적으로 표출하여 감동을 준다.
예컨데 “金萬頃(금만경) 비인 들판에 눈보라 휘날리네/ 떡사슈! 엿사슈! 어린것들 아낙네들/ 驛(역)마다 누더기들이 쫓기면서 외면서.”(南行) 또한 “누런 노덕 더미들 國旗臺(국기대)를 곱넘는다/ 주재소 굴둑에는 물신물신 연기나고/ 어허, 많기도 하네 예나제나 눈물더미!”(村風景) 등이 그러하다.
그 밖에 작품으로 소설 「익어가는 가을」(동아일보, 1938.3.19.∼4.3.)과, 평론으로 「내가 본 시조형(時調型)」(문장, 1940.6.)·「현대시조론」(문장, 1940.6.)·「이명선 저 조선문학사 평(李明善著朝鮮文學史評)」·(국제신문, 1949.1.25.)·「시화삼제(詩話三題)」(학풍, 1949.3.)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