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육진 ()

고대사
인물
남북국시대 경주 무장사 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의 비문을 쓴 서예가.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주요 관직
대아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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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남북국시대 경주 무장사 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의 비문을 쓴 서예가.
생애 및 활동사항

신분은 진골이었으며, 관등은 대아찬(大阿飡)에 이르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애장왕 10년조에 의하면 “7월에 대아찬 김육진을 당에 보내어 가서 사은하고 겸하여 방물(方物)을 올렸다.”라고 하였고, 『구당서(舊唐書)』 신라전(新羅傳)에서도 “원화(元和) 4년(809) 사신 김육진 등을 보내와서 조공하였다.”고 하였다.

당시 사행(使行) 목적은 사은에 있었다. 일찍이 800년에 당나라에서 소성왕을 책봉한 조책(詔冊)이 그 해 왕이 죽음으로써 전하지 못하고, 당나라 중서성에 보관되었던 것을 808년(애장왕 9)에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김역기(金力奇) 편에 돌려보내 주고, 아울러 왕의 숙부 언승(彦昇)과 동생 중공(仲恭)에게 문극(門戟)을 내려준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간 것이었다.

한편,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의하면 그에 앞서 803년에는 대나마(大奈麻)로서 왕명을 받들어 경주 무장사(鍪藏寺)의 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阿彌陀如來造像事蹟碑)의 비문을 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1·2면 글이 상하에 늑자(泐字)가 많아 뜻이 통하지 않으나, 그 문장과 지식은 대단함을 보여 준다. 일부 학자는 그가 쓴 것이 아니라고 하나 “□수나마신김육진봉교(□守奈麻臣金陸珍奉敎)” 운운한 것으로 보아 그가 쓴 것이라 추측된다.

더구나 당시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비문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대개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나 숙위로 가 있던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김육진도 그러한 사람이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구당서(舊唐書)』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상(조선총독부 편, 아세아문화사, 1976)
「신라하대 빈공급제자의 출현과 나당문인의 교환」(이기동, 『전해종박사화갑기념논총』,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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