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대한제국기 때,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하였으며, 신덕순 의진, 유병기 의진 등에서 활동한 의병장.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김율은 주로 김태원과 함께 광주(光州) · 함평(咸平) · 고창(高敞娼) · 영암(靈岩) · 장성(長城)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10월 초에는 신덕순(申德淳) 의진에 호군(護軍)으로 참여하였다.
이 때 김태원은 선봉이 되었으며 김율은 김태원과 함께 정읍의 내장사(內藏寺)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광주영 공격을 계획하는 등 활동하였다. 한편 김태원 · 백낙구(白樂九) 등과 함께 구례의 유생 유병기(柳秉琪) 의진에 참여하여 중군장(中軍將)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10월 29일에는 기삼연 · 김태원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고창으로 가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12월 7일에는 법성포의 주재소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며, 그 곳 사창(社倉)을 습격하여 양곡을 압수했다.
1908년 1월 3일에는 부하 100여 명을 인솔하여 함평주재소를 습격하여 무기와 금품을 노획했다. 1월 22일 김율은 기삼연 · 김태원과 함께 400여 명을 인솔하고 다시 함평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순사 파다야(波多野)를 사살했다.
같은 해 6월 기삼연이 체포되어 순국한 뒤 김태원과 함께 의진을 지휘하여 광주 일대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다수의 전과를 올렸는데, 창평(昌平)에서는 요시다[吉田藤三郞]가 인솔하는 일본기병대를 공격하여 대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8년 3월 30일 광산군(光山郡) 소지면(所旨面) 정동(鼎洞)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4월 25일 전사한 형 김태원의 시신을 확인하러 가는 도중에 잡혀 탈출을 기도하다가 일본군에게 총살당하고 말았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 『한말 호남지역의병운동사연구』(홍순권, 서울대출판부, 1994)
- 『한국독립운동사』 제1권(국사편찬위원회, 1970)
- 『독립운동사자료집』 제2·3집·별집 제1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3)
- 『한국독립사』(김승학, 독립문화사, 1965)
- 『전남폭도사(全南暴徒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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