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혜공왕 6년(770) 8월조에 “대아찬 김융이 반하여 복주(伏誅)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김융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또, 반란을 일으킨 동기도 뚜렷하지 않다.
다만 혜공왕 4년에 일어난 대공(大恭)의 난 뒤로 계속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김융의 난도 그러한 난 중의 하나라 할 것이며, 이러한 난들이 모두 혜공왕의 난정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미추왕죽엽군조(未鄒王竹葉軍條)에서 김유신의 혼령이 미추왕릉 안에서 말하기를 “신이 생전에는 국난을 구하고 삼국을 통일하였으며 지금은 영혼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있는데, 지난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죄없이 죽음을 당하니 군신이 나의 공렬을 생각지 않음이라 신이 멀리 떠나고자 하는 바 입니다.”라고 한 경술년이 바로 김융의 난이 일어난 혜공왕 6년에 해당하기 때문에 김융이 김유신의 후손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한다.
또, 『삼국사기』김유신전에 보면 김유신의 적손인 윤중(允中)이 성덕왕 때 일반귀족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였던 것을 알 수가 있는데, 김융의 난은 그러한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