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거의 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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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사건
775년(혜공왕 11) 6월 신라 중대 말 이찬(伊飡) 김은거가 일으킨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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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775년(혜공왕 11) 6월 신라 중대 말 이찬(伊飡) 김은거가 일으킨 반란.
내용

김은거는 768년 7월에 일어난 대공(大恭)·대렴(大廉)의 난을 수습한 뒤, 그 해 10월 이찬으로서 시중(侍中)이 되었다.

그러나 770년 8월 김융(金融)의 난이 있은 뒤 12월에 시중직에서 물러나고 이찬 정문(正門)이 대신 시중 자리에 올랐다. 다시 774년 9월에는 이찬 김양상(金良相 : 뒤의 선덕왕)이 상대등(上大等)이 되면서, 이듬해 3월 이찬 김순(金順)이 시중이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와중에 김은거는 시중에서 물러난 지 5년 뒤인 775년 6월에 난을 일으켰다.

김은거는 혜공왕 때 가장 규모가 큰 반란사건이었던 대공의 난을 수습한 직후에 시중이 된 것으로 보아 혜공왕의 측근이었을 것이다. 김융의 난이 진압된 직후에 은퇴한 점으로 보아 그가 정계에서 은퇴했을 때, 반왕파(反王派)의 거두인 김양상이 774년 9월에 상대등이 되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자, 김은거가 반란을 일으켜 왕권을 회복하려 했던 것 같다.

김양상이 상대등이 된 뒤 시중이었던 정문이 사직하지도 않았는데, 이찬 김순이 시중에 오르게 되었다. 신라 중대의 마지막 왕이었던 혜공왕은 아직 왕위에는 있었지만 실질적 권한은 상대등 김양상이 행사했다. 왕의 직속관원인 시중마저 자기 편 사람을 등용해 왕의 정치활동을 완전히 봉쇄해 버리자 이에 대한 반동으로 반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가 패사(敗死)한 두 달 뒤 김은거의 뒤를 이어 시중이 되었던 정문이 또다시 이찬 염상(廉相)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김은거의 난은 반란이기는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역모와는 달리 침탈된 왕권을 다시 회복하고 위태로운 사직을 바로잡기 위한 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라정치사회사연구』(이기백, 일조각, 1974)
「신라 선덕왕·원성왕의 왕위계승」(김수태 『동아연구』 3,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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