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했다. 보성중학교를 중퇴, 일본 도쿄의 도요[東洋]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1920년 독일로 유학, 뷔르츠부르크(Würzburg) 음악학교, 1924년 베를린의 하노버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웠다. 1928년 유학 중 잠시 귀국하여 경성·함흥·평양 등지에서 독주회를 열었으며, 1934년 귀국했다. 1936년 『바이올린곡집』을 출판했고, 1937년 이승학(李升學)과 함께 경성음악전문학교(京城音樂專門學校)를 설립, 초대 원장이 되었으며 1943년까지 3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1939년 동아일보사 주최 ‘전조선 작곡 발표 대음악제’ 합창곡 「곡접(哭蝶)」·「추억」, 바이올린 독주곡 「비가(悲歌)」·「푸레루디움 운트 알레그로」를 발표했다. 1941년 조선총독부가 '음악을 통한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 수행'을 목적으로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알선으로 설립된 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 결성대회에서 이사에 선출되었다. 같은해 3월 조선음악협회 대표로 '8개 단체 간부는 말한다-새로운 '문화단체'의 활동'이라는 좌담회에 참석해, 조선음악협회의 '신체제문화운동'의 취지와 활동 내용을 설명했다. 또한 『매일신보』에 「음악보국-총후엔 건전한 음악-지나사변을 맞으면서」(1941.7.2)과 「나의 저온생활(低溫生活)」(1941.12.2) 등과 같은 글을 통해 후방에서의 지원을 주장했다. 해방 이후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제1회 협의회 협의회원, 조선음악가동맹 위원장 등을 거쳤다. 6·25 전쟁 당시 납북되어, 1951년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