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5년(원성왕 1) 2월에 원성왕은 아들 김인겸(金仁謙)을 태자로 삼고, 할아버지인 흥평대왕(興平大王)과 아버지 명덕대왕(明德大王)을 오묘(五廟)에 배열하여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였다.
이때 김제공은 시중에 임명되었으나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채 임명 직후에 파면되었다. 이어 791년 1월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대아찬(大阿飡) 언승(彦昇)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시중에 임명된 직후 파면된 이유와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다만 원성왕이 788년 태학(太學)에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신설하고 유교경전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는 등 유교정치사상을 통하여 왕권강화를 시도하였던 점과 관련하여 문적출신(文籍出身)이 아니었거나, 유교적인 통치사상에 반대했던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또는 제공이 중대 무열왕계 후손으로 원성왕의 즉위에 반대적인 입장을 취하다가 791년 정월 원성왕의 태자 김인겸의 죽음을 계기로 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