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6년(우왕 12) 과거에 동진사(同進士) 5등으로 급제하였다. 성균박사로 있을 때, 성균관 생원 박초(朴礎) 등이 공양왕의 호불(護佛)을 비판하고, 호불을 조장한 김전(金琠)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박초 등이 다시 상소를 지어 성균관 생원 15인의 서명을 받았는데, 이때 생원 서복례(徐復禮)가 서명하지 않았다 하여, 박사 김초(金貂), 학정(學正) 정포(鄭包) 등과 함께 대사성 김자수(金子粹)와 상의하지 않고 퇴학시켰다.
이 일로 인하여 김자수와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는데, 후일 또 등청하는 대사성에게 결례를 범했다고 하여 김자수의 분노를 사고 순군옥에 하옥되었으나 곧 석방된 뒤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