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했다. 변사 김학근(金學根)과 여배우 김연실(金蓮實)의 동생이다. 1932년 한성중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일본 도쿄의 센슈[專修]대학 전문부를 수료했다. 이후 귀국하여 경성영화촬영소에 입사한 후, 다시 도쿄 신코[新興]키네마에 들어가 수업했다. 1939년 일본촬영기술협회 시험에 합격하여 정회원이 되었고, 신코키네마에서 3편의 일본영화를 촬영했다. 1939년 잠시 귀국하여 정비석(鄭飛石) 원작을 영화화한 방한준(方漢駿) 감독의 「성황당」을 촬영했다.
1941년 '거리의 부랑아가 고아원 교육을 통해 황국신민으로 거듭난다'는 내용을 담은 최인규(崔寅奎) 연출의 「집없는 천사[家なき天使]」, 1942년 '가난한 마을 사람들이 총동원체제의 생산력 증대를 도모'하는 내용의 「풍년가」, 교통질서 준수 선전을 위해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에서 기획한 「명랑한 도로[明るい鋪道]」 등을 촬영했다. 같은해 9월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촬영과에 입사한 후, 1943년 조선군 사령부 후원으로 조선에 수용된 영국군 포로의 일상을 기록한 안석영(安夕影) 연출의 「조선에 온 포로[朝鮮に來た浮虜]」, 1944년 방한준 연출 아래 '조선 청년이 각성하여 일본의 해양 전력증강을 꾀'하는 내용의 「거경전(巨鯨傳)」 등을 촬영했다.
해방 이후인 1947년 신경균(申敬均) 연출의 「새로운 맹세」를 촬영했고, 6·25 전쟁 중에는 최전선에서 기록영화 「정의의 진격」을 촬영하던 중 부상을 입었으며, 금성무공훈장을 받았다. 1958년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 「생명」, 1961년 「오발탄」, 1962년 「성웅 이순신」, 1968년 「아리랑」 등을 촬영했고, 1965년 영화인협회 부회장, 1971년 영화촬영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82년 11월 20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