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출생했다. 김해송은 예명이다. 여가수 이난영(李蘭影)의 남편이다. 1933년 평양 광성(光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숭실(崇實)전문학교와 일본의 조치[上智]대학을 다녔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되지 않는다. 1935년 오케(Okeh)레코드사에 입사, 자작곡 「항구의 서정」을 통해 가수 겸 작곡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미국의 재즈(Jazz)를 우리 말로 옮겨 부르기도 했다. 1936년 이난영과 결혼했다. 1937년 장세정(張世貞)이 불러 크게 성공한 「연락선은 떠난다」와 「잘있거라 단발령」 등을 작곡했다. 1938년 빅터(Victor)레코드사 , 콜럼비아(Columbia)레코드사를 거쳐 1939년 다시 오케레코드사로 복귀, 이후 주로 작곡가로 활동했다. 가수로 80여곡, 작곡가로 190여곡을 발표했다. 1938년 발표한 「전화일기」, 「사나이 걷는 길」 등은 ‘치안방해’ 등의 이유로 판매금지 및 가두연주금지를 당했다.
1940년 반도애국호(半島愛國號) 자금모집 및 북지(北支) 일본군 위문을 위한 매일신보사 베이징지국 초청의 순회공연에서 조선악극단원들과 함께 베이징·텐진[天津] 등지에서 공연했다. 1942년 「강남의 나팔수」(조명암 작사, 남인수 노래) 및 조선군보도부(朝鮮軍報道部)가 내선일체(內鮮一體)와 지원병 제도 선전을 위해 제작한 영화 「그대와 나[軍と僕]」(허영 감독)의 동명 주제가인 「그대와 나」(조명암 작사, 남인수 노래)를 작곡했다. 이외에도 「총후(銃後)의 자장가」(조명암 작사, 박향림 노래), 「이천오백만 감격」(조명암 작사, 남인수·이난영 노래) 등을 작곡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약초극장(若草劇場) 전속 극단인 약초가극단을 조직했으며, 같은해 12월에 조선흥행협회 주최로 '대동아전쟁 3주년 기념으로 명치좌(明治座)에서 개최된 '헌익예능대회(獻翼藝能大會)'에서 약초악극단이 공연한 「승리의 노래[勝利の歌]」의 음악을 담당했다.
해방 이후 1945년 8월에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무대음악무용부 집행위원을 거쳐, 12월에 케이피케이(K.P.K)악단을 조직했다. 이후 「물레방아」(1946), 「천국과 지옥」(1947), 「아리랑의 노래」(1948), 「육탄 십용사」(1949), 「칼멘환상곡」(1950) 등의 대규모 뮤지컬을 케이피케이 악단을 통해 공연했다. 1947년 대중음악협회 회장 및 전국가극협회 작곡위원 등을 맡았으며, 고려레코드사를 비롯한 여러 음반사에 「흘러온 남매」(1947), 「울어라 은방울」(1948) 등을 작곡, 발표했다. 6·25 전쟁 당시 서울에 남아 있다가 납북되던 중 사망한 것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