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정진(廷鎭), 호는 한사(漢槎). 서울 출생. 관립 소학교를 거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고, 그 뒤 모교 교관으로 재직하다가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에서 교직에 종사하였다.
1914년 미국에 건너가 캘리포니아주에서 농장을 경영하여 재정기반이 확고해지자 재미동포들과 유학생을 위한 육영사업과 문화사업에 전념하였다.
리들리(Reedley)에 로스엔젤레스한인센터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할 청년 역군들을 후원하는 한편, 『신한민보(新韓民報)』를 발행하여 재미한인들의 생활향상과 독립운동 고취에 역점을 두었다.
특히, 해외교민들의 조직에 탁월한 면을 보여 1919년 3·1운동 때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의 결의로 미국 특파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면서, 이 해 12월 7일 캘리포니아에서 이살음(李薩音)·김여식(金麗植) 등과 노동사회개진당(勞動社會開進黨)을 조직한 뒤 1921년 4월 18일 기관지 『동무』를 창간하여 민족자결주의 실천노선에 충실을 기하였다.
1937년 대한인국민총회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942년에는 재미 한족연합회를 결성하여 위원장으로 재미 동포사회의 중추 원로가 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김원용(金元容)과 함께 30년 만에 귀국, 김규식(金奎植)을 지원하며 정부 수립에 관여하는 가운데 이듬해 입법의원(立法議院) 초대 관선의원으로 선출되어 국내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그의 활동은 김규식계의 민주독립당과 민족자주연맹의 결성으로 구체화되었지만, 1948년 이승만(李承晩)의 집권은 그의 정치적 소외를 초래하여 다시 도미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캘리포니아주에서 10대 농장 가운데 하나인 리들리농장을 지키며, 재미 동포사회의 원로로 1959년 3월 김원용 저술의 『재미한인 50년사』를 발행하였다. 1962년 일시 환국하여 국군의 날 행사를 참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1968년 1월에 죽었다.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