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1723년(경종 3) 남병사(南兵使)를 거쳐 1727년(영조 3) 통제사(統制使)가 되었다. 1729년 우의정 이태좌(李台佐)의 신임을 받아 조현명(趙顯命) 등과 함께 『군공별록(軍功別錄)』을 다시 수정하기도 했으며, 그 이듬해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에 취임하였다.
그 뒤 순탄하게 승진을 거듭하여 1733년에는 우포도대장이 되고, 2년 뒤에는 총융사(摠戎使)를 거쳐 1737년 어영대장에 올랐으나 4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광해군 때의 명장이었던 김응하(金應河)의 후손으로 비록 문음(門蔭)으로 시작하였으나 대장까지 올랐다. 기강문란은 용서하지 않았으나 부드럽고 근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