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태천 출신이다. 1915년 김좌진(金佐鎭) 등이 조직한 조선군단(朝鮮軍團)에서 경영하는 군사교육기관인 사관학교에서 근무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만주 흥경(興京)에서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에 가입하여, 김기선(金基善)·탁공(卓公)·강연수(康連洙) 등과 함께 흥경현 소만류구(小萬留溝)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에게 호세(戶稅)를 걷는 업무를 담당했다.
1920년 호세 99원과 흥경현 전창(田倉)지방에서 모금한 돈 100원을 송금하고 그 해 12월에는 평안북도 창성(昌城)에서 군자금(軍資金)을 모집하는 활동을 했다. 1920년 7월 만주 해룡(海龍)·통화(通化)·흥경(興京)·무순(撫順) 등지에서 독립단(獨立團)의 토벌대장으로서 조대능(趙大能)·문창현(文昌賢)·김용보(金鎔甫)·전일록(全日祿)·권덕근(權德根)·김명봉(金鳴鳳) 등과 합작하여 일제의 주구 기관(走拘機關)인 보민회(保民會)를 토벌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24년 3월에는 봉천(奉天)에 근거를 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입했다. 같은 해 6월에는 예하 부대의 참사(參事)가 되어 소대장 손시형(孫始亨) 등과 함께 봉천을 떠나 8월 8일 평안북도 구성군(龜城郡) 관서면(關西面)에 이르렀다. 이 곳에서 최창학(崔昌學)이 경영하는 삼성금광(三成金鑛)을 습격하여 조선인 순사 김용정(金鎔禎)을 총살시킨 뒤 마을 사람들을 모아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고취시킨 뒤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후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4년 11월 18일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25년 11월 21일에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복역 중 순국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