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열(咸悅). 호는 초몽(草夢). 출생지 미상. 아버지는 남궁훈(南宮薰)이다. 1912년 서울 한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오산중학교(五山中學校) 교사로 잠시 재직하였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음악협회 간사로도 있었으며, 1920년에 창간된 『폐허(廢墟)』의 동인으로 활약하였다. 변영로(卞榮魯)·오상순(吳相淳)·염상섭(廉想涉) 등과 친교를 맺었다.
1907년 1월호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에 투고하였던 「애국설(愛國說)」에서 당시 지도층의 각성과 청소년 교육의 중요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작품 활동은 『청춘(靑春)』과 『폐허』 및 『조선일보』, 일본 잡지 『태양(太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일어 및 영어로 된 시와 수필도 있다. 1918년 『청춘』에 「고독은 너의 운명이다」 등 5편의 일문 시와 「나의 세상」·「나의 사랑」 등 2편의 영문 시가 실려 있다.
『폐허』에는 수상(隨想) 「자연(自然)」(1920)·「풀」(1921)·「생명의 비의(秘義)」(1921) 등 4편의 시, 『조선일보』에는 「신비의 인연」·「출생」 등 7편의 시, 1922년 『신생활』에는 「별의 아픔」·「마(馬)」 등 5편의 유고와 일기가 실려 있다.
27세로 요절하였기 때문에 작품수가 극히 한정되어 있으나, 얼마 남기지 못한 유작들은 한국 근대시사에서 특이한 시세계를 보이고 있다.
즉, 유년기의 민족주의적 관념과 초기 시에서 보이는 ‘미와 우주적 조화’를 포함한 다양성, 그리고 『폐허』지로부터 본격화한 시작들이 지니는 자연과 친근한 사상이 시적 특색이 되고 있다.
그의 문학은 당시 우리 문단에 만연되고 있었던 병인적(病因的) 퇴폐성이나 감상에 물들지 않고, 그 나름대로 자연의 순실미(純實美)와 ‘생명의 비의(秘義)’와 대지사상(大地思想) 등을 추구한 것 등을 특색으로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