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 · 지리에 능통하고 도술을 부려 신이한 행적이 많았다는 이인(異人) 남사고(南師古)에 관한 인물 전설이다. 남사고는 선조 때에 천문 교수(天文敎授)를 지냈다는 것 외에 뚜렷한 경력은 없지만, 당대부터 여러 문헌에 많은 설화를 남겼다.
남사고에 관한 설화는 『동야휘집(東野彙輯)』 · 『대동기문(大東奇聞)』에 각 7편, 『계산담수(鷄山談藪)』에 3편, 『송와잡설(松窩雜說)』 · 『지봉유설(芝峰類說)』 · 『어우야담(於于野譚)』 · 『청구야담(靑丘野談)』에 각각 1편씩 수록되었다. 구전 설화는 남사고의 고향인 경상북도 울진군 일대에 풍부하게 전해지며, 그 밖의 지역에서도 전해지고 있다.
문헌 설화에서는 남사고가 선조의 등극과 동서 당쟁의 시작을 예언했다는 내용이 많다. 임진왜란도 미리 알고 있었으며, 정유재란 때는 왜군이 한강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하였다. 그가 사술(邪術)로 사람들을 현혹시켰다고 혹평한 기록도 있지만, 대개 남사고의 예언이 정확했으며 인물이 뛰어나고 충성스러웠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구전 설화에서는 남사고가 조선을 정탐하러 온 왜장 헤이[平秀吉]가 중으로 변장하여 조선 지도를 그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지도를 못 쓰게 만들고 헤이를 도망치게 했다고 한다. 앞일을 예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방비책까지 강구했다는 점에서 문헌 설화와 차이가 있다. 구전되는 이 유형은 이인이 외적을 퇴치한 이야기의 좋은 예가 된다.
설화 속에 나타나는 남사고의 도술은 반드시 긍정적인 의미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산사에 들어가 이상스러운 중에게 도술을 배웠다는 것은 그가 지닌 도술의 출처가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보여 주는 것일 수 있다. 평소에는 할 일이 없어 집에 든 도둑이나 골려 주고, 참외 장수나 골탕을 먹였다고 한다. 사술을 부리다가 이황(李滉)에게 제지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엇보다 구비로 가장 많이 전승된 유형은 「구천십장(九遷十葬)」이다. 남사고가 풍수지리에 정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버지 무덤을 쓸 때에는 욕심에 눈이 어두워 아홉 번 이장하고 열 번 무덤을 썼으나 망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남사고는 '비룡상천(혹은 구룡쟁주)형'의 명당에 부친 묘를 썼는데, 이를 본 노인(혹은 어린아이, 일꾼)이 '고사괘수(혹은 구사쟁와)'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깜짝 놀라 주변을 다시 살피니 묘 아래 너른 바다가 실은 메밀밭이어서 잘못된 자리인 줄 깨달았지만 결국 더 이상 묘를 옮기지 못했고 남사고도 곧 죽고 말았다는 내용이다. 남사고가 무리한 짓을 한 탓에 자손도 없다고 한다.
남사고가 도가적 술법을 선택했으므로 유가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단적인 인물이 된다. 이러한 점을 들어서 일부 문헌 설화에서처럼 구전 설화에서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구비 설화는 남사고를 통해 향반이나 하급 관리들의 횡포를 고발하거나, 명당에 집착하는 양반들의 위선과 허위 의식을 조롱하고, 지나친 욕심과 능력에 대한 과신을 경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