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조선 후기, 세곡의 안정적인 수송을 위하여 충청도 태안에 설치한 안민창(安民倉) 가운데 남쪽에 설치된 창고.
제정 목적
안흥량을 우회하기 위하여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연결하기 위한 굴포 공사가 고려와 조선 시대 두 왕조에서 5차례에 걸쳐 추진되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현종 대에 안흥량을 우회하기 위한 일환으로 굴포 공사가 이루어졌던 그 장소에 안민창을 설치하고, 세곡을 육지에서 운반하도록 실시하였다.
내용
안민창의 남창은 25칸, 북창은 15칸으로 지었다. 각 창고에는 2칸마다 벽으로 막고 각기 자호(字號)를 써서 각 배의 미곡을 구별하여 쌓도록 하였다. 또 남창의 천자(天字) 창고에 쌓였던 미곡은 반드시 북창의 천자 창고에 옮기게 하여 서로 바뀌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조선 정부는 안민창을 설치하면서 삼남에서 올라오는 선박 가운데 4월 30일까지 원산도에 도착한 선박은 곧장 해로를 통해 서울로 상납하게 하고, 5월 1일 이후 도착한 선박은 반드시 남창에 세곡을 하역하여 육로로 북창까지 운반한 다음 다시 선박에 적재하여 상납하게 하였다. 즉, 안흥량을 우회하기 위한 방안으로 태안에 남창과 북창을 설치하고 세곡을 육로로 수송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었다.
참고로 남창(南倉)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로서 중앙의 재무 기관과 군사 기관, 지방 일반 군현에도 남창이라는 창고가 다수 존재하였다. 여기서 서술한 남창은 태안 안민창의 남창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변천사항
이런 이유로 안민창 설치를 반포한 지 7년 만인 1676년(숙종 2)에 조선 정부는 원산도의 도착 기일에 상관없이 조운선의 세곡을 서울의 창고로 바로 납부하라고 지시하였다. 따라서 안민창은 1676년 이후로 더 이상 활용되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의의 및 평가
참고문헌
단행본
- 윤용혁 외, 『태안의 해양ㆍ교통운수 관련 유적』(태안문화원, 2017)
- 최완기, 『조선후기 선운업사 연구』(일조각, 1989)
논문
- 문광균, 「태안의 굴포유적 명칭 검토와 역사적 가치」(『해양문화재』 13,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20)
- 문경호, 「안흥량과 굴포운하 유적 관련 지명 검토」(『도서문화』 43,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2014)
- 윤용혁, 「서산, 태안지역의 조운관련 유적과 고려 영풍조창」(『백제연구』 22,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91)
- 이종영, 「안흥량 대책으로서의 태안조거 및 안민창 문제」(『동방학지』 7,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63)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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