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반도의 서쪽 끝 연안에 있는 안흥량은 곳곳에 암석이 발달하였을 뿐 아니라 서해 바다의 협수로로 전근대에 가장 험난한 항해 지역으로 손꼽혔다. 고려와 조선 왕조는 지방에서 징수한 세곡을 선박을 이용하여 개경이나 한양으로 운반하였는데, 그 항로 중 가장 위험한 곳이 바로 안흥량이었다.
안흥량을 우회하기 위하여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연결하기 위한 굴포 공사가 고려와 조선 시대 두 왕조에서 5차례에 걸쳐 추진되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현종 대에 안흥량을 우회하기 위한 일환으로 굴포 공사가 이루어졌던 그 장소에 안민창을 설치하고, 세곡을 육지에서 운반하도록 실시하였다.
조운선이 침몰하여 사회적으로 여러 파장을 일으키자 김육과 그의 아들 김좌명(金佐明)은 지속적으로 경제 정책을 건의하였다. 이들이 건의한 경제 정책이 실시되면서 1669년(현종 10)에 안민창을 설치하였다. 안민창은 태안과 서산의 경계에 있는 북포(北浦)와 남포(南浦)에 각각 설치되었고, 이를 북창(北倉)과 남창(南倉)이라 하였다.
안민창의 남창은 25칸, 북창은 15칸으로 지었다. 각 창고에는 2칸마다 벽으로 막고 각기 자호(字號)를 써서 각 배의 미곡을 구별하여 쌓도록 하였다. 또 남창의 천자(天字) 창고에 쌓였던 미곡은 반드시 북창의 천자 창고에 옮기게 하여 서로 바뀌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조선 정부는 안민창을 설치하면서 삼남에서 올라오는 선박 가운데 4월 30일까지 원산도에 도착한 선박은 곧장 해로를 통해 서울로 상납하게 하고, 5월 1일 이후 도착한 선박은 반드시 남창에 세곡을 하역하여 육로로 북창까지 운반한 다음 다시 선박에 적재하여 상납하게 하였다. 즉, 안흥량을 우회하기 위한 방안으로 태안에 남창과 북창을 설치하고 세곡을 육로로 수송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었다.
참고로 남창(南倉)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로서 중앙의 재무 기관과 군사 기관, 지방 일반 군현에도 남창이라는 창고가 다수 존재하였다. 여기서 서술한 남창은 태안 안민창의 남창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안민창의 남창에 세곡을 하역한 다음 육로로 다시 북창까지 수송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거리가 비록 짧았지만 세곡의 절차와 과정이 복잡하였을 뿐 아니라 남창에서 북창까지 수송하는 과정에서 세곡이 손실하는 일도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안민창 설치를 반포한 지 7년 만인 1676년(숙종 2)에 조선 정부는 원산도의 도착 기일에 상관없이 조운선의 세곡을 서울의 창고로 바로 납부하라고 지시하였다. 따라서 안민창은 1676년 이후로 더 이상 활용되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전근대 국가 경제가 쌀과 콩 등의 현물 경제에 기반한 만큼 조운 제도는 국가 운영에서 매우 중요한 시스템이었다. 안민창은 고려와 조선 시대 5차례나 추진되었던 굴포 공사가 실패한 후 지세가 험한 안흥량을 우회하기 위하여 추진한 노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