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남창일(南昌一), 남일(南一)이라고도 불렸다. 길림성(吉林省) 연길현(延吉縣) 화연리(花蓮里)의 상촌(上村) 출신이다.
명신소학교(明新小學校)에 재학 중 김우진이란 친일교장을 반대하는 투쟁에 참여하였다. 1928년 화연리에서 빈일운동에 참가하였다. 1930년 ‘간도 5·30봉기’ 때 상촌반제동맹의 책임자로서 어머니와 여동생도 함께 참가하도록 하였다. 1931년초 화련리적위대 결성에 참가하고 소대장이 되었다. 그해 가을부터 1932년 봄 사이에 동만주지방을 휩쓸었던 추수투쟁(秋收鬪爭)과 춘황투쟁(春荒鬪爭)에 적극 참가하였다.
이 투쟁은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난 직후에 벌어진 투쟁이었기 때문에 동만주지방에서 항일유격대가 결성되는 초석을 놓았다. 1932년 5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고, 7월에 해란구(海蘭溝) 항일유격대를 결성하는데 참가하였다. 남창익은 김순덕과 함께 유격대의 발전에 노력하였다.
1933년 겨울 일제의 치안숙정공작을 이겨낸 남창익은 그해 초 연길현 왕우구(王隅溝) 유격근거지로 가서 현(縣) 유격대에 참가하였다. 이때 제2중대 정치지도원이 되었다. 1934년 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3단 정치위원이 되었다. 남창익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왕청현(汪淸縣) 일대에서 토벌군과 전투를 벌이다 1934년 9월에 북합마당(北哈蟆塘)에서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