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사미(士美), 호는 주1 할아버지는 남규(南珪)이고, 아버지는 곡산군수 남치신(南致信)이며, 어머니는 하비(河備)의 딸이다. 영의정 남곤(南袞)의 형이다.
1489년(성종 20) 진사시에 주2 1502년(연산군 8) 별시 문과에 병과로 주3
1508년 기사관(記事官)으로 있던 중 소세량(蘇世良)과 함께 사초의 내용을 발설하여 무오사화의 단초를 제공한 이극돈을 주4 같은 해 홍문관 수찬에 이어 사간원 주5이 되었고, 1509년에는 예조 좌랑을 지냈다. 1514년에는 뇌물받은 일로 대간이 탄핵하였느나 받아들여지지 주6 1514년에 연산군 때 진상한 유기(鍮器)를 남용한 죄로 탄핵을 받았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지만, 1515년에 같은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주7
1530년에 소격서 영을 지낼 때, 동료인 유종원이 쌀과 밀가루를 횡령하자, 그가 모를 일이 없다는 이유로 이후 수차례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537년 12월 학관(學官)으로 있던 중 송사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주8
그는 떨어진 옷을 입고 산천을 돌면서 스스로 창랑거사(滄浪居士) · 소요자(逍遙子)라고 불렀다.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네가 여덟번 벼슬을 제수받아 세번을 사양하고, 다섯번 나간 것은 부모가 있으므로 뜻을 굽힌 것이나, 집에는 선대의 토지와 집이 있어 살아가기 충분하니 내 죽은 뒤로는 벼슬에 나가지 말라. 그리고 묘비에는 단지 공조(工曹)의 옛 직함만 쓰고, 전한(典翰) · 직제학(直提學)은 취임하지 않았으니 쓰지 말라.”고 하였다.
뒤에 명종이 말하기를 “고(故) 직제학 남포는 물러나는 절개가 가상하고, 그 아들의 청백함은 옛사람이라도 넘지 못할 것이다.”하고 상을 내렸다. 권신 남곤의 형이었으나 권세에 물들지 않고 깨끗이 살아 당시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