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출신으로, 본관은 교하(交河), 자는 여림(如林), 호는 한원(漢源) · 금석(今石)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진사 노서(盧序), 증조할아버지는 노치당(盧致唐), 할아버지는 통덕랑 노성규(盧聖圭)이다. 아버지는 성균진사 노명흠(盧命欽)이며, 『동패낙송(東稗洛誦)』을 지었다. 어머니 광주이씨는 한산부원군 이손(李蓀)의 딸이다.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공부를 배우다가 15세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이용휴(李用休) · 박지원(朴趾源) · 이봉환(李鳳煥) 그리고 홍봉한(洪鳳漢) 집안의 많은 자제들과 교유하면서 최신의 문학사조를 흡수하며 성장하였다.
1765년(영조 35) 진사시에 입격하면서부터 과시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지만, 이후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홍봉한의 셋째 아들 홍낙임(洪樂任) 집에서 그의 자제들을 가르치며 세월을 보냈다. 1777년(정조 1) 과장(科場)에서 글을 팔았다는 죄목으로 사풍(士風)을 어지럽히는 인물로 지목되어 위원군(渭原郡)에 유배되었다가 5년 뒤 풀려났다.
저술로 『 한원문집(漢源文集)』이 전해지는데, 6대손 노재영이 1976년에 노긍의 저술을 수습해 간행한 것이다. 노긍은 스스로 “내 시율(詩律)과 산문에는 세속을 놀라게 하는 것이 많고, 진부한 면이 있는 것은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라고 언급했을 만큼 당대 문단에서 독특한 개성의 시와 소품(小品)으로 명성이 있었다.
이가환(李家煥)과 정범조(丁範祖)는 노긍에 와서야 비로소 문학의 세계를 여는 길이 열렸다고 평가하였고, 정약용은 그가 기교한 표현을 잘한다고 인정하였다. 과문(科文)에도 뛰어나 당시 사류들의 추앙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