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열은 조선 후기 헌릉참봉으로 시작해 의금부도사·연천현감·함창현감 등을 두루 역임하며 만년까지 관직생활을 지속한 문신이다. 난사(蘭社)라는 시사(詩社)의 동인으로 참여하여 당대 유명 문사들과 폭넓게 교유하는 등 18세기 서울의 문예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저술로는 『해양시초(海陽詩鈔)』가 있다.
1753년(영조 29) 진사시에 입격한 후 관직에 나아가 헌릉참봉 · 정릉참봉 · 동몽교관 · 의금부도사 · 연천현감 · 함창현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91년(정조 15) 함창현감 재직 당시 선현 배향과 관련한 유생 상소를 금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을 당하였으나 이듬해 서용(敍用)되었고, 이후 위솔 등을 역임하며 만년까지 관직 생활을 지속하였다.
젊은 시절 송재도(宋載道)의 주도로 결성된 난사(蘭社)라는 시사(詩社)의 동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시사의 구성원이었던 홍양호(洪良浩) · 신광하(申光河) · 홍상철(洪相喆) · 홍경후(洪景厚) · 성대중(成大中) 등 당대 문사들과 교류하였다.
또한, 박지원(朴趾源) · 이한진(李漢鎭) · 이덕무(李德懋) · 이광려(李匡呂) 등 노 · 소론계 및 서얼과도 교유하며, 폭넓은 문예 활동을 영위하였다. 특히 성대중과 절친하게 지내면서 자식들까지 교유를 이어갔는데, 이로 인해 성대중과 그 아들 성해응(成海應)의 문집에 나열과 관련한 기록들이 많이 보인다.
저술로는 『해양시초(海陽詩鈔)』 1책이 전하는데, 필사본 형태로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나열이 지은 모든 시가 수록된 것은 아니고, 제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의 시 가운데 만년의 작품들을 뽑아 1책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규상(李奎象)은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서 나열이 동생 나걸(羅杰)과 함께 시적 재능으로 명성이 있었고, 둘 다 글씨를 잘 썼다고 평가하였으며, 오세창(吳世昌)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나열이 왕희지를 배워서 글씨가 기이하고 강건하다고 평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