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학 ()

농사직설
농사직설
산업
개념
농업에 관한 원리와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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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농업에 관한 원리와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
내용

자연과학의 여러 분야가 두루 응용되는 과학으로, 그 범위는 농업의 그것과 같이 넓게 잡으면 20여 가지 분야를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러나, 좁게 보면 곡류(두류 포함)와 특용작물(섬유작물·담배·인삼 등 공업용 작물) 등을 다루는 작물학(agronomy)을 뜻한다.

농학은 엄격히 말하여 19∼20세기에 세워진 구미(歐美)의 근대농학을 뜻하는 것으로서, 우리 나라에는 개항 이후 농업기술의 도입과 함께 부분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유럽의 농학이론이 중국을 거쳐 실학자들의 저술에 반영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옛날에는 중국의 농서(農書)들, 예를 들면 ≪제민요술 齊民要術≫·≪사시찬요 四時纂要≫·≪왕정농서 王楨農書≫·≪농상집요 農桑輯要≫ 등이 들어와서 우리 나라의 농학발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전통시대의 농학

기록에 따르면 우리 나라에서 농서를 최초로 간행한 것은 고려 후기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이암(李嵓)이 가져온 ≪농상집요≫를 복각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농학은 ≪제민요술≫ 등 중국 농서의 영향으로 나름대로 진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농서의 간행이 활발해지는데, 위에 든 중국 농서의 번각·초출(抄出)·이두번역 등이 이루어지는 한편 이를 참고로 편찬한 농서도 간행되었다.

세종 때의 관찬인 ≪농사직설 農事直說≫은 우리 풍토에 맞는 농사지침서로 주곡작물의 경작법을 간결하게 논술한 것이다. 세종은 농잠서(農蠶書)의 편찬·간행 외에 벼와 목화의 재배시험장을 설치하여 평안도와 함경도의 북변에도 재배를 가능하게 하려는 시도를 했다.

한편 민간의 농서 저술도 활발하여 ≪금양잡록 衿陽雜錄≫·≪사시찬요초 四時纂要抄≫·≪청천양화록 菁川養花錄≫ 등 우수한 책들이 나왔다.

≪금양잡록≫은 곡식작물을 품종별(80품종)로 나누어 형태와 재배법을 설명했고, ≪사시찬요초≫는 곡식작물·채소·과수의 재배, 축산·양잠·양봉 그리고 계절에 따른 식품가공 등을 논술하였다. ≪사시찬요초≫는 중국의 농서인 ≪사시찬요≫의 체재 참고와 다소의 인용은 있어도 내용은 거의 한국화된 것이다.

≪농사직설≫·≪금양잡록≫·≪사시찬요초≫의 세 농서에 ≪구황촬요 救荒撮要≫가 부가되어 합본된 것이 ≪농가집성 農家集成≫으로서 1656년(효종 7)에 간행되었다. 이와 같이 ≪농가집성≫은 조선시대 전기의 농학을 종합 체계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실학(實學)의 학풍이 성숙하면서 실학자들의 농정론(農政論)이 농업기술론과 아울러 강력히 대두하였다. ≪반계수록 磻溪隨錄≫·≪농포문답 農圃問答≫ 같은 제도론적 저술, ≪색경 穡經≫·≪산림경제≫와 같은 소백과서(小百科書)를 겸한 농서들이 나왔다.

그리고 계속되는 흉작은 식량정책에 심한 압력을 주어 여러 가지 구황서적이 간행되었으며, 1763년 조엄(趙曮)이 고구마[甘藷]를 들여온 뒤 고구마의 재배·저장·가공의 연구가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강씨감저보≫·≪감저신보 甘藷新譜≫·≪종저보 種藷譜≫ 등이 그 예이다. 영조·정조·순조 대에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과 사조가 팽배해진 가운데 인접국 특히 중국(명나라 말기∼청나라 초기)과의 교류의 영향이 농학에도 크게 미치게 되었다.

북학파(北學派)라는 실학의 한 흐름에 속하는 학자들의 저술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박지원(朴趾源)의 ≪과농소초 課農小抄≫와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 北學議≫이다.

이 두 책에서는 다같이 농업정책·토지제도·농업기술이 비판, 논의되었으며, 특히 농업기술론에서는 서양농법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던 중국농법의 소개가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두 농서는 정조가 권농시책의 하나로 전국에 널리 농서를 구하여 응모한 40건 중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러한 실학자들의 농학은 ≪해동농서 海東農書≫·≪농정회요 農政會要≫·≪수차도설 水車圖說≫ 등을 거쳐 ≪임원경제지≫로 집성되었다.

≪임원경제지≫는 별칭 ≪임원십육지≫라고도 하는데, 16개 부문 중 7개 부문이 농업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는 음식·가옥·복식·섭생·의약·관혼상제·취미·지리·경제 등을 논술한 것이다.

≪임원경제지≫는 농업을 우선으로 논술하면서 실용적인 모든 사항을 덧붙여 포함시킨 대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다. 농업에 해당하는 7개 부문 기술에서는 곡류재배, 화초 및 약초재배, 과수류 관리, 섬유작물 경작, 잠업·기상·축산 등으로 분류해 논술하였다. 이로써 전근대 농학의 총결산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조선시대 초기부터 우리 나라 농학은 움텄고, 전반기의 농학은 ≪농가집성≫으로 마무리되었으며, 그 뒤 실학자들에 의한 농학은 농업정책과 토지제도의 개혁을 강조하면서 경작기술의 개선을 논하였던 것이다.

북학파 이후 실학자에 의한 농학은 서양의 문물이 다분히 가미된 중국의 농학서들, 이를테면 ≪태서수법 泰西水法≫·≪농정전서 農政全書≫·≪천공개물 天工開物≫을 많이 참고하고, 또 실제로 중국농업을 견문한 경험에 입각하여 논술을 펼치고 있다.

근대농학의 도입

북학파 이래의 실학자들에 의한 농학은 서양의 농법이 상당히 반영이 된 것이기는 하지만, 보다 과학적인 근대농학이 이 땅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개항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병인양요·병자수호조약과 같은 열강들의 치열한 압력과 국내정변을 빈번히 겪는 속에서 개항이 강요되고서야 개화의 물결이 세게 닥치기에 이르렀다. 외국과의 문화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자 다른 문물과 함께 선진 농학 및 농업기술의 도입도 시작되었다.

최초의 견미보빙사(遣美報聘使)가 귀국한 뒤인 1884년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이 설치되고 잠상공사(蠶桑公司)가 창립되었다.

시험장에서는 각종 농작물(344종)과 가축(64두)이 도입, 육성되었으며, 수확물의 종자는 지방 여러 곳으로 보내 첨부된 해설서를 따라 재배하도록 권장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관리관이었던 최경석(崔景錫)이 갑자기 죽어 이 사업은 좌절되었다.

한편 일본으로 파견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에 참가하였던 안종수(安宗洙)는 일본의 농학서적을 참고하여 한문으로 쓴 ≪농정신편 農政新編≫(1881)을 지었으며, 이것이 호평을 받아 1855년에는 연활자(鉛活字)로 인행되었다.

그 뒤 정병하(鄭秉夏)는 우리 나라 최초의 국한문 혼용 활자본인 ≪농정촬요 農政撮要≫를 발간했는데, 내용은 서양·중국·일본의 농서를 참조한 듯하다.

농학교육기관으로는 학부(學部)가 1904년에 설립한 농상공학교(農商工學校)가 그 효시이다. 이 학교에 부속하여 뚝섬에 실습과 연구를 위한 농장도 마련했으나 1906년에 수원의 권업모범장으로 흡수되었다.

농상공학교의 농과는 농림학교로 독립되어 1907년에 수원의 새 교사로 옮겼다. 일본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권업모범장은 일본화된 서양농법을 우리 나라에 이식하려고 일본 쌀품종의 도입·육종·보급을 위한 연구에 착수했다.

이어서 각 도에는 종묘장(시험장)과 면화채종포를 설치하였다. 1910년에 일제의 강점이 시작되면서 농림학교는 조선총독부 농림학교로 개칭되고 권업모범장에 부속되었다.

그 뒤 농림전문학교(1918)·고등농림학교(1922)·수원농림전문학교(1944)로 개편, 개명되었다. 농업계고등학교도 점차 늘어나 1942년에는 49개 학교에 달하였다.

농학연구기관인 모범시험장은 농사시험장으로 개칭되고 많은 산하기관을 설치하면서 식민지농업정책에 맞는 방향으로 강력히 추진되어 나갔다.

특히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으로 벼재배면적의 확대와 품종개량에 힘을 기울였다. 일제강점기의 우리 나라 농업근대화는 일본이 받아들인 서양농학을 밑바탕으로 이루어졌으나, 일본의 식민지정책과 자본진출로 이루어진 것이다.

부분적인 농업발전은 상당한 수준으로 향상되었으나, 서양농학의 과감한 도입과 우리 나라에 맞는 농학연구의 기회는 얻지 못했다.

광복 후의 농학

광복 직후의 혼란과 뒤이은 6·25전쟁으로 1950년대 전반까지는 한국농학의 획기적인 전환이나 진전은 없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농학교육기관으로 농과대학이 10여 개 학교로 늘어났고, 농학연구기관으로는 일제강점기의 농사시험장이 몇 번의 개편을 거쳐 1957년 농사원(農事院)으로 발족되었다.

농사원 산하에는 중앙과 각 도에 농사시험장·원예시험장·작물시험장을 두어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한국농학회(1945∼1962)도 발족하여 농학관계 학회를 처음으로 창립하게 되었다.

학회지의 논문발표와 연구기관의 시험보고 또는 논문집 발간도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농사원은 1962년 농촌진흥청(農村振興廳)으로 개편되어 농사시험연구뿐만 아니라 농촌지도·생활개선·기술훈련 등도 관장하게 되었다.

그 동안 농학관계 학회는 10여 개로 늘어나 1976년에는 이들을 종합하는 한국농림수산협회(현재의 농업과학협회)가 창설되었다. 또 1966년에는 원자력원 산하에 방사성농학연구소(放射性農學硏究所)가 신설되었고, 각 농과대학의 부설연구소와 연구실의 연구활동도 점차 활기를 띠어갔다.

1960년대에 이루어진 농학관계 업적 중 특기할 것은 우선 초기에 있어서 노후화답(老朽化畓) 및 추락답(秋落畓)에 관한 연구, 저위생산지개략조사, 수도품종육종연구(水稻品種育種硏究)의 강력추진,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한 농학연구 등을 들 수 있다.

이 무렵 국내에서 육성된 수도품종으로는 재건·진흥·신풍·호광(湖光)·수원62호·풍광(風光) 등이 있으며, 또 통일계 수도품종 시조인 IR667의 육성도 이루어졌다.

수도 외에 밀[小麥]품종의 육종에서는 영광·장광 등이 나왔고, 보리에서는 부흥 등이 이루어졌다. 토양연구에서는 개략토양도와 정밀토양도(精密土壤圖) 작성, 그리고 토양비옥도 조사사업도 진행되어 우리 나라 농업발전을 위한 획기적인 성과로 평가되었다.

조기육묘(早期育苗), 수도작기(水稻作期) 이동, 건답직파(乾畓直播), 규산비료(硅酸肥料) 사용, 엽면시비(葉面施肥) 등의 연구도 성과를 올렸으며, 기술보급도 활발했다. 또 병충해 방제 및 예찰(豫察)에 대한 연구와 한해대책연구도 실효 있게 이루어졌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1960년대에 이룩한 연구개발의 성과가 더욱 발전을 보게 되었다. IR667(통일)은 1970·1971년의 시험결과로 다수확성이 인정되어 1972년에는 30만ha의 면적으로 보급되었다.

이어서 조생통일(早生統一)·유신·밀양 등 통일계 품종이 계속 육성되어 통일벼를 대신하여 적지재배를 하도록 되었다. 이들 품종은 다수확성은 물론 내도복성(耐倒伏性)·내충성·내병성·내랭성(耐冷性) 그리고 미질(米質)까지 고려하여 육성된 것이다.

품종의 육종과 아울러 이를 뒷받침할 재배관리법, 즉 보온못자리 개발, 병충해의 효율적인 방제, 수리개선, 다비(多肥) 등도 쌀의 증산에 크게 이바지했다. 밭작물인 밀과 보리의 품종들도 여러 가지 개발되었는데 1977년 맥류연구소(麥類硏究所)가 농촌진흥청 산하에 신설되어 계속 신품종을 육성하였다.

1970년대에 활기를 띠기 시작한 학회활동은 계속, 성장 발전하여 논문발표가 각 학회마다 매년 수 백을 헤아리게 되었다. 1985년 20개 학회로 늘어나 정기발표회와 심포지엄 개최, 학회지 발간, 그리고 국제심포지엄 참가 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관련학회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농업경제학회·한국농공학회·한국농업기계학회·한국농업교육학회·한국농화학회·한국식물보호학회·한국원예학회·한국육종학회·한국임학회·한국작물학회·한국잠사학회·한국축산학회·한국낙농학회·한국토양비료학회·대한수의학회·한국농업환경학회·한국잡초학회 등이다.

이들 학회는 대부분 1995년 현재 35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매년 4, 5회의 학술지 출간과 빈번한 발표회를 가지고 있다.

1990년대의 농학계는 1970∼1980년대의 도약기를 거쳐 국제적인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양적인 추진에서 질적인 전환을 보이고 있다.

가장 중요한 쌀생산연구를 보더라도 다수확 일변도에서 다수확성을 확보하면서 미질(米質)의 다양성도 중시하는 연구에서 취반성(吹飯性:밥을 지음)·가공적성(가공식품 종류에 따름)·기호(밥맛)·향미·색미 등 다채로운 품종을 연구개발하고 있다.

이를 위해 유전공학과 생명공학기술을 적용하는 연구도 활발하여 그 기초가 되는 벼의 유전자 지도를 164품종에 대해 완성하고 있다. 주곡 재배기술과 아울러 시설농업과 기계화의 발달도 활발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국제적인 변화가 우리의 농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어 농업과학의 향방에 큰 조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른바 세계화 또는 지구화라는 미명으로 국제경제력강화와 우루과이라운드협정의 압력을 크게 받게 되었다.

그리고 또 엘리노현상 등 전지구적 기상변화로 언제 가뭄이나 수해가 엄습할지 모르는 환경에 처하여 있고 지구온난화, 지구파괴 등 갖가지 재난으로 위협받고 있다. 따라서 이제 언급한 인위적 자연환경에 대한 우리 농학의 진로 또한 어려움이 많게 되었다.

전 망

21세기를 향한 국가발전의 기본방향에 있어 우리 농업을 살리는 길을 예의 모색할 때가 왔다. 즉, 농업은 식량확보, 국토와 환경의 보존, 지역개발, 사회안전 등을 위해 존재한다고 본다.

아울러 국제적인 자연환경적인 강한 영향을 받게 된 현재 작물재배와 가축사양에 적용한 첨단기술의 연구를 위해 생산기반정비, 경영구조개선, 생산비절감을 위한 기계화 및 시설화, 공업과의 연관성증대, 농업정보망강화, 농촌의 공동화(空洞化) 방지 등 국제경쟁력강화를 위한 대책의 연구가 절실하다.

참고문헌

「21세기산업사회에 있어서의 농업의 역할」(이춘녕, 『학술원론문집』35집, 1996)
「개항개화기의 한국농학」(이춘녕, 『학술원논문집』 31집,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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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업경제사』(주봉규, 문운당, 1971)
『한국농업기술사』(한국농업기술사발간위원회, 1983)
『한국농정20년사』(농업협동조합중앙회, 1965)
『한국농학사』(이춘녕, 민음사, 1990)
『한국토지제도사연구』(김옥근, 대왕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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