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당시 서울에서 학생으로 참여 했던 조재건(趙在健)·함석은(咸錫殷)·오학수(吳學洙)·지중진(池仲振)·박영우(朴永祐) 등이 만주로 피신, 1919년 3월 안동현(安東縣)에서 이 단체를 결성하고 안병찬(安秉瓚)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간부진은 단장 함석은, 간사 박영우, 서기 장자일(張子一)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초기에는 주로 평안북도 출신의 청년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패기 있고 투쟁정신이 강한 청년들로 구성된 이 청년단은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 모금 및 조달, 강화회의에 파견된 대표자에 대한 후원, 임시정부의 정책·정령(政令)을 선전하는 기관지 『반도청년보(半島靑年報)』의 발행 등을 주요한 활동으로 하였다.
청년단은 각지에서 참여한 수천명의 회원을 기반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여 나갔다. 하지만 결성된 지 5개월여 밖에 되지 않은 9월 경 안동현의 일본경찰에 조직과 활동상황이 탐지되어, 총재 안병찬을 비롯한 조재건·박영우 등 간부와 회원들이 대부분 체포되자 활동이 일시 정지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안병찬이 병보석중 탈출, 만주로 돌아와 같은 해 11월 관전현(寬甸縣)에서 김승만(金承萬)·김시점(金時漸) 등과 각 지방청년단의 결합체인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함으로써 대한독립청년단은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대한청년단연합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