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응(道膺)은 고려 말 문신으로 본관은 성주(星州) 호는 청송당(靑松堂)이다. 조선 태조의 죽마지우(竹馬之友)이자 두문동(杜門洞) 72현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예산 지역 성주 도씨(星州道氏)의 입향조(入鄕祖)이기도 하다. 도응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데 고려 우왕 때 과거에 급제한 뒤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등을 지냈으나 조선이 세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홍주(洪州, 현재 충청남도 홍성) 노은동(老隱洞)에 은거하였다. 태조가 친구와의 옛정을 생각해 벼슬을 내리고 여러 차례 조정으로 불렀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태조는 도응의 충절과 절의에 찬탄하여 청송당이라는 호를 내렸다. 묘역은 도응이 말년에 은거하였던 홍주 노은동과 이웃한 곳이다.
도응선생의 묘역은 충청남도 에산군 응봉면 매봉산(173.2m) 기슭의 낮은 구릉 사면에 동향으로 자리한다. 묘역은 왕릉의 사초지(莎草地)처럼 경사진 언덕 위에 조성되었다. 봉분은 묘역 정상에 위치하며 도응의 처 단양 우씨(丹陽禹氏)의 묘와 함께 쌍분을 이룬다. 원형의 봉분에는 별다른 시설물은 없으며 뒤편으로 꼬리[龍尾]가 이어져 사성(莎城)과 연결된 모습이다. 2개의 봉분 사이 전면에 묘비와 상석, 혼유석이 배치되었다. 봉분 전면에는 1단의 계체석(階砌石)이 설치되어 있다. 그 아래로 전면 왼쪽에는 비석 1기가 세워져 있고 양쪽에 문인석과 망주석이 각각 1기씩 배치되어 있다. 석물 사이에는 장명등 1기가 세워져 있다. 봉분과 사성 등 묘역은 정비된 것이며 석물도 대부분 후대에 세워진 것이다. 묘역 아래에는 후손들이 건립한 신도비 2기와 재실인 경충재(景忠齋)가 건립되어 있다. 도응 묘역 인근 산줄기에는 손자인 도순손(都順孫) 부부의 무덤이 있다.
1993년 묘역 정비가 이루어졌을 당시 땅속에서 높이 88㎝, 폭 37㎝, 폭 16㎝ 크기의 묘비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앞면에 ‘고려국중대광문하찬성사성주도공휘응지묘(高麗國重大匡門下贊成事星州都公諱膺之墓)’ 측면에 ‘병오팔월일재중수(丙午八月日再重修)‘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정확한 중수 시기는 확인되지 않았다. 묘역 아래 정면 왼쪽의 신도비는 도응선생의 14세손 병택(秉澤)이 전(篆)을 하고 풍천(豊川) 임영호(任英鎬)가 쓴 것으로 도응과 성주 도씨에 대한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정면 오른쪽 신도비(1991년 건립)는 ‘중대광문하시중찬성사 청송당성주도공휘응신도비(中大匡門下侍中贊成事靑松堂星州都公諱應神道碑)’라 새겨져 있다.
도응선생 묘역은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계정길 9-20에 있다. 1993년 11월 12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현재 성주 도씨 청송당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도응과 관련한 자료로 1393년(태조 2)~1397년(태조 6) 동안 태조가 도응에게 하사한 사령 왕지(王旨) 4매와 녹패(祿牌) 등 5매의 ‘성주 도씨 종중 문서 일괄’이 전해진다. 1981년 7월 15일 보물 제724호로 지정된 이 문서는 도응의 생애와 조선 전기 관제와 새보(璽寶)의 변천 과정 등을 살펴보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묘역의 구조와 석물은 후대에 정비되어 본래의 모습은 많이 남아 있지 않으나 고려말 문신 도응 선생의 충절과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