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마현용(馬現龍). 호는 백수(白首). 일제 관헌자료에는 오해추(吳海秋)로도 나온다. 함경북도 길주 출신. 마진(馬晉)의 아들로, 마준(馬駿)과는 형제간이다.
1905년 부모를 따라 화룡현(和龍縣) 덕신사(德新社)로 이주하여 창동학교(彰東學校)와 용정(龍井)의 명동학교(明東學校), 대랍자(大拉子)의 현립학교를 졸업하였다. 1920년 길림성립(吉林省立) 제1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중국어를 구사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던 마천목은 1926년 중국 광주(廣州)에서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교도단에 입대하였다. 1927년에는 무한(武漢)에 있는 정치군사학교 장교로서 호북한국혁명청년회(湖北韓國革命靑年會)와 상해(上海)에 있는 재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에 각각 가입하였다.
1929년 중국공산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오성륜(吳成崙), 진공목(陳公木) 등과 길림성 반석현(磐石縣)으로 가서 ML그룹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입당, ML파 고려공산당 만주총국 간부가 되었다. 9월에는 반석현에서 열린 재중국한인청년동맹 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오성륜, 진공목과 함께 남만주 지방에서 반제반봉건운동이 좌경적으로 진행되도록 주도하는 한편, 우수한 한인 사회주의자를 중국공산당에 입당시키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하지만 이 때까지는 소수의 인원만 중국공산당에 입당할 수 있었다.
1929년 말부터 1930년 3월 사이에 중국공산당 가입방침이 확정되었다. 기존의 콤그룹을 해체하고 실천과정에서 검증을 받은 사람만이 개별적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는 것이 기본방침으로 정해졌다. 여기에 가장 먼저 대응한 콤그룹이 ML그룹이었다.
ML그룹은 1930년 3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해체하고, 중국공산당에 개별적으로 가입할 것을 선언하였다. 마천목도 1930년 5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마천목은 만주서위원회의 특파원인 박윤서(朴允書) 등이 지도하는 5·1투쟁행동위원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간도 5·30 봉기’에도 참가하였다.
1930년 7월 중국공산당 돈액(敦額)임시당부 책임자로서 박윤서의 지도 아래 ‘8·1길돈봉기(吉敦蜂起)’도 지휘하였다. 액목현(額穆縣)에서 중국 관헌에 체포된 후 액목현성감옥에서 1931년 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