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학(蒙學)은 잡학(雜學)의 한 과목으로서 잡과(雜科) 가운데 역과(譯科)에 속해 있었는데, 역과에는 한학(漢學), 몽학, 왜학(倭學), 여진학(女眞學)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대외 관계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므로 역학(譯學)과 그에 대한 교육도 성행했을 것 같으나 기록이 영세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1276년(충렬왕 2)에 처음으로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해 한어(漢語)를 습득하게 했으며, 뒤에 사역원(司譯院)을 두고 역어(譯語)를 관장하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즉, 1389년(공양왕 1)에 십학(十學)을 설치해 사역원에 이학교수관(吏學敎授官)을 두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로 보아 사역원은 고려 말에 설치되어 역학 및 이학을 교육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외교 정책으로 사대교린(事大交鄰)을 표방하여 일찍부터 역학 교육에 힘썼다. 1393년(태조 2) 4월에 육학(六學)에 역학을 두어 양가(良家)의 자제를 뽑아 교육한 것으로 보인다. 몽학에 관한 기록은 1394년 12월에 몽고어 교수(敎授) 1인을 두었다는 것이 처음이다. 그후 1410년(태종 10) 1월 몽어훈도관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사역원에서 어학 교육을 받는 사학(四學)의 학생 수는 시대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1428년(세종 10) 12월의 기록에 전함권지생도(前銜權知生徒) 18인, 체아(遞兒) 2인이라고 하였다. 또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몽학 생도가 10인으로 되어 있고, 지방에서는 몽학을 가르치지 않았다. 『경국대전』의 기록에 한학 35인, 여진학 20인, 왜학 15인(외방 학생은 한학 90인, 여진학 40인, 왜학 26인)에 비해 몽학 생도의 수가 가장 적은 것은 시대적 영향으로 몽학이 점차 퇴조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들 학생은 거의 잡과에 뜻을 두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몽학의 시취(試取) 인원수를 보면 초시(初試) 4인, 복시(覆試) 2인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몽학훈도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학생들이 잡과에 많이 합격할 수 있도록 그들을 교육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 사역원에서 교육한 사학(四學)의 순서는 중요도에 따라 한학, 몽학, 왜학, 여진학 순이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여진학이 청학(淸學)으로 바뀌면서 청학이 한학 다음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자, 몽학은 2순위에서 3순위로 밀려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