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학 ()

첩해신어
첩해신어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역학(譯學) 중 하나인 일본어.
정의
조선시대 역학(譯學) 중 하나인 일본어.
개설

조선시대 역학으로는 왜학과 함께 한학(漢學), 몽학(蒙學), 여진학(女眞學, 淸學)이 있었다. 1393년(태조 2) 사역원을 설치하고 어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왜학 전공자가 유규어(琉球語)를 같이 익히기도 하였다.

내용

1390년(공양왕 1) 10학, 즉 예학(禮學), 악학(樂學), 병학(兵學), 율학(律學), 자학(字學), 의학(醫學), 풍수음양학(風水陰陽學), 이학(吏學)을 설치하였다. 이학은 사역원에 속하게 하고 교수관(敎授官)의 지도 아래 전문 교육을 실시하였다.

조선은 개국과 함께 1393년(태조 2)에 역학(譯學)을 병학, 율학, 자학, 의학, 산학(算學) 등 6학의 하나로 설치하여 양가(良家)의 자제들로 익히게 하였다. 1406년(태종 6) 좌정승 하윤(河崙)의 건의에 따라 유학과 함께 무학(武學), 이학, 역학, 음양풍수학(陰陽風水學), 의학, 자학, 율학, 산학(算學), 악학(樂學) 등 10학의 하나로 설치하였다. 이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유학, 무학, 역학, 의학, 음양학, 산학, 율학, 화학, 도학, 악학으로 완성되었다. 10학 중에서 유학과 무학은 양반들이 입속하였으며, 나머지 8학은 잡학(雜學)이라 하여 기술직 중인층이 담당하였다.

왜학 학습이 실록에서 처음 보이는 것은 1414년(태종 14) 사역원에 명하여 자제들로 하여금 일본어를 익히게 한 것이다. 이듬해에 왜학을 설치하고 왜학 생도(倭學生徒)의 일본어 교육을 시작하였다. 왜학 교육을 담당한 기관은 사역원(司譯院)이었다. 1393년(태조 2) 고려의 제도를 따라 사역원을 설치하여 여러 나라의 말을 통역하는 일을 맡아 사대교린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한어·몽어·왜어·여진어 교육을 시행하였다. 사역원은 부경사행(赴京使行)이나 통신사행(通信使行)을 수행하고 표류, 도래인(渡來人) 등 외국인들의 통역을 맡았으며 역과 과거와 역학 취재시험 등을 관장하였다.

1466년(세조 12) 관제를 정하면서 왜학 교수직으로 왜학훈도(倭學訓導) 2명과 함께 한학교수(漢學敎授) 2명, 한학훈도 4명, 몽학과 여진학 훈도 각 2명을 두었다. 『경국대전』의 사역원의 직제를 보면 도제조(都提調: 정1품) 1명(時原任 대신 중에 겸임), 제조(提調: 종2품) 2명, 정(正: 정3품 당하) 1명, 부정(종3품) 1명, 첨정(僉正: 종4품) 1명, 판관(判官: 종5품) 2명, 주부(主簿: 종6품) 1명, 한학교수 4명(2명은 문신이 겸임), 직장(直長: 종7품) 2명, 봉사(奉事: 종8품) 3명, 부봉사(정9품) 2명, 한학훈도 4명, 왜학·몽학·여진학 훈도 각 2명, 참봉(參奉: 종9품) 2명 두었다. 교수와 훈도 외에는 체아직(遞兒職)으로, 1년에 두 차례 관리의 공과를 평정하여 승진 또는 출척시키는 인사행정인 도목(都目)을 실시하였다. 취재(取才) 시험에서 차점을 차지한 사람은 지방직으로 보냈다. 서울과 지방의 어학 훈도는 근무일수 900일이 차면 바꾸었다. 주부 이상은 모두 역과시험 합격자로 임명하였다. 외국사신의 영접과 생도 교육을 위하여 경상도 제포(薺浦)와 부산포(釜山浦)에는 왜학훈도가 배치되었다.

조선시대 왜학 교육은 중앙인 사역원과 지방에서 이루어졌다. 『경국대전』「예전」 생도조에 의하면, 왜학생도의 정원은 사역원에 15명, 제포·부산포에 각 10명, 염포(鹽浦)에 6명 등 모두 41명이었다. 지방 왜학 생도를 대외 관계가 빈번한 지역에서 육성하였다. 지방에서 1년에 6명씩 왜학생도를 세공(歲功)하게 하였다. 생도에게는 경제적으로 외방(外方)이나 본가(本家)에 대한 잡역(雜役)을 면제해 주는 혜택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호내(戶內)의 인정(人丁) 2명, 호내에 인정이 없는 자는 호(戶)별로 1명을 주어 학문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왜학생도는 취재와 역과 시험을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역과 시험은 대·소과의 구별이 없는 단일과로서 식년시와 증광시에만 실시되었으며, 초시와 복시 2단계만 있고 전시는 없었다. 초시는 식년(자·오·묘·유) 전 해 가을에 사역원의 주관 아래 실시되었고, 복시는 식년 봄에 사역원 제조와 예조 당상관의 주관 아래 실시되었다. 합격자 정원은 초시에 한학 45명, 왜학·몽학·여진학 각 4명으로 총 57명, 최종 선발 시험인 복시에 한학 13명, 몽학·왜학·여진학 각 2명으로 총 19명이다. 식년시와 증광시가 동일하였다. 국가에 경사가 겹쳤을 때 특별히 실시되는 대증광시는 초시에 각 전공별로 4명, 복시에 각 전공별로 2명씩을 더 선발하였다.

시험 과목은 전문서와 『경국대전』이며, 초시와 복시가 동일하였다. 왜학 시험 방법은 사자(寫字)와 역어(譯語)가 있었다. 사자(寫字)는 글씨를 베껴 쓰는 것으로 원어문자를 베껴 쓰는 시험이다. 사자 시험과목은 『이로파(伊路波)』·『소식(消息)』·『서격(書格)』·『노걸대(老乞大)』·『동자교(童子敎)』·『잡어(雜語)』·『본초(本草)』·『의론(議論)』·『통신(通信)』·『구양물어(鳩養物語)』·『정훈왕래(庭訓往來)』·『응영기(應永記)』·『잡필(雜筆)』·『부사(富士)』등이었다. 역어(譯語) 시험은 갑국문자를 을국문자로 번역하는 것으로, 『경국대전』을 보고 일본어로 번역하게 하였다. 각 과목은 통(通)·약(略)·조(粗)로 채점하는데 통은 2분(分), 약은 1분, 조는 반분으로 계산하여 점수가 많은 사람을 선발하였다.

합격자에게는 예조인(禮曹印)을 찍은 백패(白牌)를 주었다. 합격 성적에 따라 7품에서 9품의 관품을 주고 사역원 권지(權知)로 임명하였다. 1등은 종7품계, 2등은 종8품계, 3등은 종9품계를 주고, 이미 품계를 가진 사람은 1계를 더 올려주고, 올린 품계가 마땅히 받아야 할 품계와 같을 때에는 다시 1계를 올려주었다.

역관들은 직책과 능력을 살려 실질적인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였다. 실무적인 행정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자신들의 직분을 활용해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許生傳)』에 나오는 당대 한양의 제일 부자 변부자는 실존 인물인 왜학 역관 변승업(卞承業)의 조부를 모델로 삼은 것이다. 당대 역관들이 누렸던 경제력의 일단을 가늠해볼 수 있다.

변천과 현황

『속대전』에 이르러 왜학생도 규정은 변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시대의 흐름과 수요를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사역원의 왜학생도는 25명이 증액되어 40명, 제주에 왜학생도 15명, 거제에 왜학생도 15명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반면에 10명의 왜학생도가 있었던 제포와 6명이 있던 염포는 폐지되었다. 전체 왜학 생도는 41명에서 80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왜학의 시험과목은 『속대전』에서 『첩해신어』가 새롭게 추가되고 나머지 과목은 모두 폐지되었다. 『첩해신어』는 임진왜란 때 포로였던 역관 강우성(康遇聖)이 편찬한 일본어 학습서다. 일본어를 히라가나로 적고 한글로 읽는 법과 뜻을 기록한 것이다. 시험 과목의 변화는 왜학뿐 아니라 다른 역학 전공에서도 나타난다. 시의에 따른 변화상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전반적으로는 시험과목의 수가 축소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 왜학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일본 에도 막부의 요청에 따라 통신사가 파견됨에 따라 왜학의 비중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통문관지(通文館志)』
『한국의 역학』(강신항, 서울대출판부, 2000)
『사역원 왜학 연구』(정광, 태학사, 1988)
「조선후기 잡과교육의 변화와 특성」(이남희,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13-1, 2014)
「조선시대의 사역원제도」(원영환, 『남계조좌호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1977)
「조선초기의 기술관과 그 지위」(이성무, 『혜암유홍렬박사화갑논총)』, 1971)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이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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