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무장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의 제사에 사용하던 음악.
일명 관왕묘악(關王廟樂)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의 관왕묘는 임진왜란 당시, 즉 1598년(선조 31) 4월 명나라의 도독(都督) 진린(陳隣)이 관왕묘의 신령이 나타나 신병(神兵)으로 도와주었다고 하여, 그가 주둔하고 있던 남산 기슭에 세워 그 안에 관우와 주창(周倉)의 조상을 받든 데서 비롯한다.
명나라 장수들이 처음 세운 곳은 지금의 남대문 밖 도동(桃洞)이었으며, 6·25전쟁으로 불에 탈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1599년 4월 또 다른 관왕묘 건립에 대한 왕의 전교로 동대문 밖에 역사를 시작하여 1601년 8월 지금의 동묘(東廟)가 준공되었다.
우리 나라 자체로서 동(東)·남(南) 관왕묘에 제향을 둑소(纛所)의 예에 따라 시행한 것은 대개 광해군 때인 것으로 짐작되고 1년에 두 차례, 즉 춘향(春享)은 경칩일(驚蟄日)에, 그리고 추향(秋享)은 상강일(霜降日)에 관원을 보내어 지내게 하였다.
둑소의 예란 군신으로서 중국 고대의 전설적 인물인 치우(蚩尤)라는 사람을 둑신으로 하여 뚝섬[纛島]에서 지내는 국가의 제례이다. 관왕묘의 제향은 대장으로 하여금 갑옷과 투구를 갖추어 제사하게 하고, 악공도 역시 갑옷과 투구를 입고 5방(五方)에 기치(旗幟:깃발)를 세웠다.
관왕묘의 악은 본래 고취(鼓吹)의 악이니 곧 군악이다. 일찍이 정조가 관왕묘 비명(碑銘)을 지어 묘정(廟庭:묘당)에 세우고, 그 뒤 장악제조(掌樂提調)의 계(啓)에 따라 그 왕이 지은 비명을 장(章)으로 나누어 악가(樂歌)를 삼고 악은 3성(成)을 쓰니, 관묘에 음악을 사용한 것은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향음악에서 영신악(迎神樂)은 「왕재곡(王在曲)」이라 하며 그 원곡은 「소무(昭武)」 3성이요, 전폐(奠幣)와 초헌(初獻)·아헌(亞獻)·종헌례(終獻禮)의 악은 「힐향곡(肸蠁曲)」이라 하며 그 원곡은 「분웅(奮雄)」이요, 철변두(徹邊豆)와 송신(送神)의 악은 「석하곡(錫嘏曲)」이라 하며 그 원곡은 「영관(永觀)」이다.
악원(樂院)의 규헌(規憲)에 “관왕묘악은 이미 고취를 사용하니 즉 군악이다. 그런데 지금 「정대업(定大業)」 중의 「소무」·「분웅」·「영관」 3장의 악을 쓰고 이를 노래한다는 것은 사(詞)와 악이 어긋날 뿐만 아니라, 그 3장은 악무(樂舞)로서 본래 고취에 쓰이지 않는 것이다.”고 하였으나, 일제시대도 계속 「정대업」 중의 3곡을 사용한 것을 보면 고쳐지지 않았던 것 같다.
한말 이후 국가가 지내는 제사는 폐지되었으나 관우를 숭앙하는 신도들에 의해서 묘가 관리되고 제사도 옛식대로 집행하게 되었다. 일제시대는 남묘 한 곳에만 제사를 지냈고, 음악은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에서 소편성한 악원을 파견하여 연주하였다. 제사는 1년에 세 차례 지냈는데 봄에는 경칩일, 가을에는 상강일, 그리고 5월 1일 관우의 생일 등에 행하였다.
봄·가을의 제사에는 제악으로 「정대업」의 「소무」와 「분웅」·「영관」 장이 태평소(太平簫)를 주축으로 하여 연주되었고, 여름 관우의 생일에는 연악으로 「삼현영산회상」의 곡이 연주되었다.
『증보문헌비고』에 악기는 중고(中鼓) 1, 장고(杖鼓) 2, 필률(篳篥) 2, 대금(大琴) 2, 태평소(太平簫) 2, 대금(大金) 2, 소금(小金) 1, 가(歌) 2, 해금(奚琴) 2로 편성되어 있으며, 『속악원보』에 무안왕묘제악보(武安王廟祭樂譜)가 수록되어 있다.
인솔과 집박(執拍:박을 치는 것)을 겸한 아악수장(雅樂手長) 1인에 연주원 9인 등 총 10인으로 편성되는 것은 3회의 제사가 같았는데, 봄·가을은 제향의 절차이었고, 5월 관우의 생일은 다례(茶禮)의 모습이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서 이왕직아악부의 아악 주악은 못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