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성휴(聖休). 아버지는 필징(必徵)이다. 1708년(숙종 34) 유학(幼學)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보령현감(保寧縣監)으로 부임하였다. 이때 그는 백성들을 자식같이 생각하여 그들의 부담과 고통을 덜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지방관리들을 철저히 단속하여 기강을 확립한 결과 백성들의 칭송이 잦았다. 이러한 사실들이 암행어사 이진망(李眞望)을 통하여 왕에게 알려져 1714년 왕은 그를 직접 불러 포상하였다. 1719년 중앙의 경직(京職)으로 발탁되어 예조좌랑에 부임하고 그뒤 영암군수로 전출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나, 그곳에 귀양온 홍석보(洪錫輔)의 조사문서를 잘못 관리하여 크게 문책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