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예의판서(禮儀判書)·군부판서(軍簿判書)·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368년(공민왕 17) 천추사(千秋使)로 원나라에 갔으나 요양(遼陽)에서 길이 막혀 돌아와 장형을 받은 뒤 다시 원나라로 갔다.
1376년(우왕 2) 원나라의 승상(丞相) 나하추(納哈出)에 의하여 돌아왔으나, 1377년에 예의판서로 다시 원나라에 가게 되었다.
이때 최영(崔瑩)으로부터 이인임(李仁任)과 함께 지윤(池奫)을 죽인 사실을 나하추에게 병사한 것으로 말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고, 최영에게 “다시는 이와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말하여 최영이 부끄러워하였다고 한다.
그 뒤 원나라에 가서 나하추에게 보빙(報聘)하고 돌아와 왕에게 옥대와 유리배(琉璃盃)를 바쳤다. 이해 9월 북원(北元)에 있던 강인유(姜仁裕)가 나하추가 명나라 정요위(定遼衛)를 치기 위하여 고려의 지원군을 기다린다는 독촉을 하였다.
그러자 원나라에 가서 군사를 보내지 못한다는 뜻을 전하였다. 1380년 책명사(冊命使)로서 원나라에 가서 절일(節日)을 하례하고 책명에 대한 사례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