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에 신라의 고승 혜숙(惠宿)이 창건하였다. 자세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욱면(郁面)이 염불수행하여 극락왕생한 절로 유명하며 『삼국유사』에는 욱면의 왕생설화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신라 경덕왕 때, 남자 신도 10여 명이 서방극락정토의 왕생을 발원하고, 염불만일계(念佛萬日契)를 이 절에 조직한 뒤 수행하였다. 그 10여 명 중 아간(阿干) 귀진(貴珍)이 있었으며, 귀진에게는 계집종인 욱면이 있었다. 욱면은 집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 염불을 하였으나 법당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마당에서 하였다.
주인 귀진은 욱면이 일은 하지 않고 항상 자기를 따라다니며 염불하므로 이를 미워하여 곡식 두 섬을 주면서 하루 저녁에 다 찧어 놓으라고 시켰다. 그러나 욱면은 초저녁에 이 일을 다 마치고 절에 와서 부지런히 염불하였다. 욱면은 미타사의 뜰 좌우에 긴 말뚝을 박고,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서 말뚝에다 매어 합장하고 좌우로 흔들면서 수행하였다. 그때 공중에서 “욱면랑은 법당에 들어가서 염불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를 들은 절의 승려들이 욱면에게 권하여 함께 법당에 들어가 염불을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음악소리가 서쪽 하늘에서 들려오고 염불하던 욱면은 몸을 솟구쳐 법당의 대들보를 뚫고 서쪽으로 날아갔다. 마을 밖에 이르러 육신을 버리고 부처가 되어서 연화대(蓮花臺)에 앉아 큰 빛을 발하면서 천천히 사라져 가니 그 때까지도 하늘의 음악소리는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법당 지붕에 뚫린 구멍은 열 아름이나 되었으며, 아무리 비가 많이 내려도 젖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 어떤 사람이 금탑 하나를 만들어서 그 구멍을 맞추어 소란(小欄) 반자 위에 모셔 그 이상한 사적을 기록하여 놓았는데, 일연(一然)이 『삼국유사』를 지을 때도 그 글씨와 탑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뒤 회경(懷鏡)이 승선(承宣)·유석(劉碩)·이원장(李元長) 등과 함께 절을 중창하였다. 회경은 직접 토목공사를 맡았는데, 처음 재목을 운반할 때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삼[麻]으로 삼은 신과 칡으로 삼은 신을 한 켤레씩 주고, 또 옛날의 신사(神祠:신령을 모신 사당)로 가서 불교의 이치를 설명하였으므로, 그 신사 옆에 있는 재목을 베어 5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고 한다.
그 뒤 절이 매우 번성하여 그 지역 일대에서 가장 번창한 큰 절이 되었다. 그러나 이 절의 폐사 시기 등은 알려져 있지 않다. 『삼국유사』에는 이 절이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에 해당하는 강주(康州)에 있다고 하였으나, 『한국사찰전서』에는 보선(寶璿)의 설 등 여러 가지 근거를 밝히면서 지금의 영주시에 해당하는 강주(康州)의 오기임을 지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