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해(寧海). 시중 박감(朴瑊)의 후손이다.
처음에 음보(蔭補)로 벼슬에 나가 밀직부사를 역임하였다. 1394년(태조 3) 대사헌 재직 시 상소를 올려 가선대부(嘉善大夫) 이하 4품 이상의 첨직(添職)을 받은 자는 임명장에 그 전직(前職)을 기록하게 하여 관직을 함부로 주는 폐단을 방지할 것을 건의했다.
또 이듬해(1395년)도 태조에게 상소를 올려 풍악을 절제할 것, 전렵과 궁 밖 행차는 일정한 때를 정하여 할 것, 토목 공사를 줄일 것, 아첨하는 무리들을 물리칠 것, 부처와 귀신 섬기는 것을 번잡하게 하지 말 것, 여악(女樂)을 금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1398년 경기우도도관찰사(京畿右道都觀察使)로 기선군역(騎船軍役)의 고통과 폐단을 상주하였다.
1402년(태종 2) 총제(摠制)로 있을 때 사신을 영접하지 않은 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통진(通津)으로 유배되었다. 1405년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의 부유후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1411년 대사헌 재직 시에는 토목 역사의 중지를 간청하였다.
같은 해 손흥종(孫興宗) 사건을 가볍게 처리하였다는 사헌부의 논핵(論劾)을 받았다. 1412년 완산부윤(完山府尹)이 되고 다음 해 물러났다. 시호는 양정(良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