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강화 출생.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진학하여 4학년 때부터 배구선수로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1935년 철도국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중 1938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이 만주원정경기를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서울에서 비공식경기를 가진 바 있었다.
당시 그의 뛰어난 기술과 학업의욕을 인정받아 1939년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였으며, 그 대학 배구팀이 전승의 상아탑을 구축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탁월한 경기기술과 지도력으로, 한국인으로서 일본대학팀 주장을 맡기도 하고 일본대표팀의 선수로도 활약하였다.
광복 후 이화여자고등학교·체신부·해군·세관 배구팀 등을 창단하고, 후진양성과 배구인구의 저변확대 및 경기기술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45년 대한배구협회가 창립된 뒤 1946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배구협회위원으로 활약하고, 그 뒤 1954년까지 대한배구협회 이사장직을 맡았다. 같은 해 10월 홍콩 원정경기에서는 코치로 활약한 바 있다. 그 당시 국제배구경기는 9인제경기에서 6인제경기로 경기방법이 바꾸어지던 때로서, 6인제 경기에 대한 인식부족과 경기기술 및 지도자의 부족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그는 6인제 배구를 체계화하고 보급하는 데 헌신적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 결과, 1959년 제 40회 전국체육대회에 처음으로 6인제 배구경기가 채택되었다. 대한배구협회에서는 그의 공적을 후세에까지 기리기 위하여 1962년 4월 제1회 박계조배쟁탈 전국남녀배구대회를 창설하여 현재까지 매년 정기적으로 행하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