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박천 출생.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시절에 야구선수로 활약하였으며, 1909년 7월 제1차 유학생야구단이 모국을 방문할 때 선수단원으로 귀국하여 평양·개성·선천·안악·철산 등지를 순회하면서 국내야구단과 경기를 가지고 야구지도를 한 적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1918년 귀국하여 이원용(李原容)·이중국(李重國)과 교유하면서 조선체육회의 창립 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동아일보』의 창간과 함께 기자로 활약하였으며, 창간 열흘만인 4월 10일부터 3일간에 걸쳐 「체육기관(體育機關)의 필요를 논함」이라는 글을 게재하여 일반인들의 체육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 글의 요지는 전후 세계 각국의 사정과 앤트워프 올림픽대회에 대해서 간략히 논하고, 우리나라의 올림픽대회 불참이 통일된 체육 통할기구의 결여 때문임을 지적하였다. 또한 단합의 주지(主旨)로 ‘운동의 장려, 운동가의 양성, 운동과 운동가에 대한 편의의 도모’를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제반사항을 지원할 기관이 창설되면 우리나라 운동계에 신기원을 세우게 될 것임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기사는 각계 각층의 적극적인 호응을 유발시켜 마침내 1920년 7월 우리민족 고유의 체육단체인 조선체육회를 창설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창립준비위원 10명 중 한명으로 활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