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경기감사, 강화유수, 병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이어 1697년 외직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파직당하였다. 이어 예조참의가 되어 과장(科場)의 폐습을 일소해보려고 상소했다가 구설에 휘말려 인천부사로 좌천되었다. 그 뒤 황해·영남의 감사를 거쳐 이조참의 때 교리 박필명(朴弼明)의 탄핵을 받고 은거하였다. 대사간 등의 여러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가지 않다가 경기감사·강화유수(江華留守) 등에 나갔다가 곧 돌아왔다.
1711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이듬해 한성우윤이 되었다. 그의 재임시 조·청 두 나라의 국경을 확정하고 그 증거로서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그 뒤 병조참판·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거쳐 호조와 공조를 제외한 4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사람됨이 굳세고 과감해 별로 친히 지내는 사람이 없이 사람들로부터 외경(畏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는 언제나 부름을 받았고 또 맡은 일도 잘 처리하였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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