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후기 충청병마우후 겸 창의사, 상주영장 겸 영남창의사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이때 마침 서울에 있다가 반란의 소식을 듣고는 급히 고향에 돌아와 군사 수백 명을 모집, 반적(叛賊)의 토벌에 나서 대신들의 추천으로 충청병마우후 겸 창의사(忠淸兵馬虞候兼倡義使)로 임명되어 신천영(申天永) 등 20여 인의 목을 베어 조정에 올려보냈다.
이어 이인좌와 사전에 치밀한 모반계획을 세운 바 있는 정희량(鄭希亮)이 경상도의 안음(安陰: 지금의 안의)·거창·합천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 상주영장 겸 영남창의사(尙州營將兼嶺南倡義使)에 임명되어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곧 인수(印綬)를 풀고 돌아왔다가 조정의 명령이 없이 임지를 무단 이탈하였다는 죄목으로 고향에 잠시 유배되었다. 그 뒤 해미현감(海美縣監)을 거쳐 창성부사(昌城府使)가 되고, 1732년 강계부사에 임명되어 창성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풍서집(豊墅集)』(이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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