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함경남도 신흥에서 출생했다. 1936년 함흥고등보통학교 5년 재학 중 일본 육군사관학교 시험에 합격, 같은해 6월 일본 육군예과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예과의 후신, 1937년 8월 육군사관학교에서 독립)에 입학, 1938년 과정을 마친 후 그해 9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39년 9월 제52기로 졸업한 후 포병과에 지원, 일본 육군 포병 소위로 임관하여 복무하던 중 육군항공사관학교에 지원, 1940년 6월 졸업 후 육군항공병 대위로 근무했다.
1943년 『매일신보』는 제4회 항공일(9월 20일)을 맞아 그와 갖은 인터뷰를 게재했다. 일본 다치가와[立川]육군항공정비학교 교관으로 근무 중인 '함경남도 출신 하루바야시[東林] 대위'로 소개된 이 기사에서 그는 조선인 항공장교로 '전사'한 지린태(池麟泰, 대위)·다케야마[武山 : 최명하(崔鳴夏), 대위]·오다[太刀 : 노태순(盧泰順), 중위]·혼다[本田 : 전원상(田源上), 중위]·이근철(李根晳, 소위) 등을 추모하면서, 조선 청년에게 '패배는 동양인종이 미·영의 노예가 되는 길이기에, 승리를 위해 일본 육해군의 항공병이 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일본군 항공정비 소좌(少佐 : 소령)로 해방을 맞았고, 이후 국방경비사관학교(이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48년 제5기로 졸업, 소위로 임관했다. 국방경비대 항공대 창설요원으로 활동했고, 1949년 6월 육군본부 항공국 국장을 거쳐, 같은해 10월 공군이 창설되자 공군 참모 부장(副長)이 되었다.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육해공군 합동지휘소장을 거쳐 그해 10월 공군 준장으로 승진했으나, 11월 12일 정찰비행 도중 함경남도 함흥 부근 상공에서 전사했다. 사후 공군 소장으로 일계급 특진했고, 이듬해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51년 7월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