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공서(公瑞). 박진환(朴震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증휘(朴增輝)이고, 아버지는 박성익(朴成翼)이며, 어머니는 부사 서정리(徐貞履)의 딸이다. 현감 민종로(閔宗魯)의 딸과 혼인하였다.
1699년(숙종 25)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1701년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같은 해 가주서(假注書)로 재임 중 경연석상에서 불경스러웠다는 이유로 추고당하였다.
이후 여러 번 정언에 올랐으며, 1705년 아전(衙前)의 잘못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 왕의 잘못을 강경하게 지적하는 등 활발한 언론활동을 하여 강직하다는 평이 실록에도 여러 번 실리게 되었다.
1706년 도당록(都堂錄)에 올랐으며 문학(文學)이 되었다. 1707년 부수찬·수찬이 되었으며, 이때 이유민(李裕民)을 배척하여 왕으로부터 불경하다는 평을 받았다. 이듬해 경상도의 암행어사로 나갔다.
1710년 이후 헌납·이조좌랑·부수찬·수찬·이조정랑·부교리·교리·응교·헌납 등을 각각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1711년 응교가 되었을 때는 승진이 너무 빠르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713년 왕에게 존호 올릴 것이 논의될 때 처음에는 찬성하여 품계가 올려지기까지 하였으나, 나중에는 반대하여 자기 주장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비판을 많이 들었다. 1716년 전라도관찰사·승지·이조참의·대사성에 올랐다.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왕의 부름에 즉시 따르지 않아 처벌의 명령을 받았다. 이후 예조참판을 역임하고, 1718년 왕세자빈이 사망하였을 때 왕과 왕비의 상복을 정하는 데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