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여도(汝道). 박응복(朴應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동열(朴東說)이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박호(朴濠)이며, 어머니는 신흠(申欽)의 딸이다.
1630년(인조 8) 진사시에 합격, 1645년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세마(洗馬)를 지냈다. 1654년(효종 5) 춘당대 정시에 갑과로 급제하여 전적·병조좌랑·정언·직강·지평·사예·부평부사(富平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 1) 사간으로 있을 때,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기년제(朞年制)를 주장하여 채택하게 하였다. 이듬해 첨지중추부사에 이어 좌승지·도승지·내의원부제조·한성부우윤·동지의금부사를 거쳐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1663년 호조참판으로 재직 중 당시 판서인 정치화(鄭致和)는 업무처리가 매우 상심(詳審)한 데에 크게 탄복하였다 한다. 그 뒤 도승지·예조참판·개성부유수를 역임하였다. 평소 도량이 넓고 검소하여 재산을 모으지 못하고 항상 빚을 얻어 생활하였다.
온건한 서인계열로 홍명하(洪命夏)·박장원(朴長遠)·이경휘(李慶徽)·서필원(徐必遠)·이상진(李尙眞) 등과 교유하였고, 특히 윤선거(尹宣擧)와는 우의가 두터웠다. 송준길(宋浚吉)은 박세모를 가리켜 재상(宰相)의 풍도(風度)가 있다고 말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