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전기에, 강원도관찰사, 이조참의, 전주부윤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삼년상이 끝나자, 다시 전적으로 복직하고 이어서 호조정랑을 거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다. 경연에서 고금 제왕들의 치란흥망(治亂興亡: 선정과 악정 및 부흥과 망함)에 관한 이유를 설파하니 모두 감탄하였다.
3년 뒤에 병으로 사임했다가 다시 공조정랑으로 복직하였다. 이어서 병조정랑·장령(掌令)·집의(執義)·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직제학(直提學)·좌승지를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스스로 검약을 지켜 지방관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부리면서 바른 선비들을 배척하자 스스로 원해 남원부사가 되었다. 그 때 권세가 허확(許確)이 전주부윤으로 내려왔으나 찾아가 인사하지 않았다. 허확과 그의 아들 허항(許沆) 등이 몇 번 초청하므로 마지못해 잠시 찾아보고 곧 돌아와 버렸다.
병으로 벼슬을 사직하고 나주 옛집으로 내려가서 2년을 지냈다. 다시 도승지로 복직했다가 곧 대사헌이 되었다. 그 때 허항이 전날의 감정으로 모함해 공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곧 파직을 당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에 다시 병조참의로 복직되니, 허항이 또 모함을 해 해주목사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 선정을 베풀고 백성들을 교화해 왕이 옷감을 내려 포상하였다.
그 뒤 대사성·병조참의·이조참의·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가 인종 때 한성부좌윤 겸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中宗實錄)』의 편찬을 감수하였다. 명종 때에 전주부윤이 되었다.
성품이 곧아 윗사람에게 아첨하지 않았으므로 당시 세도가인 김안로나 허확의 부자들로부터 심한 박대를 받았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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