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9년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했다. 1901년 시종원(侍從院) 분시어(分侍御), 개성부(開城府) 분봉상사(分奉常司) 주사, 1903년 내장원 관삼제조(官蔘製造) 임시검찰촉탁(臨時檢察囑託), 1905년 대한천일(大韓天一)은행 개성지점장을 지냈다. 1906년 여왕릉령(麗王陵令)을 맡으면서 1908년 탁지부 삼정사무조사원(蔘政事務調査員)과 개성금융조합 조합장으로 활동했다. 1909년 경기관찰도 개성군수, 풍덕군수 서리 등으로 근무하던 중 1910년 일제강점 이후 개성군수로 유임되었고, 1912년 명승사적 보존 등의 목적으로 조직된 개성보승회(開城保勝會)의 발기인·회장 등을 지냈다. 같은해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손봉상(孫鳳祥) 등과 같은 개성 지역 거상들과 함께 금융업·창고업·위탁판매 등의 목적으로 합자회사 영신사(永信社)을 설립하여 취체역이 되었다. 1913년 5월부터 6월까지 경기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을 지냈으며, 5월에는 최기창(崔基昌) 등과 함게 합명회사 개성사(開城社)를 설립하여 사장이 되었다. 같은해 6월 개성군수직을 사직했다.
1914년 개성제일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 9월 시정(施政)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15년 11월 다이쇼[大正]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6년 개성신사(開城神社) 설립에 참여했으며, 1917년 4월 경성일보·매일신보사가 주최한 남북만주시찰단 단원으로 만주를 다녀왔다. 1918년 개성공립상업학교 설립위원으로 교사 건축비를 후원했으며, 7월 반도시론사(半島時論社)와의 인터뷰에서 일선동화론(日鮮同化論)에 찬동하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 1920년노동공제회(勞動共濟會) 개성지회 회관 건립비를 후원했고, 11월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 면협의회원에 선출되고, 12월 관선 경기도 도평의회원에 임명되었다. 1922년 송도도기(松都陶器)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취체역 사장에 취임했으며, 개성부제(開城府制) 실시 진정운동 위원으로 활동했다. 1924년 4월 도평의회원 선거에 당선되었고, '내선융화(內鮮融和)의 철저한 실행'을 강령으로 내세운 동민회(同民會)의 회원으로 참여했다. 1926년 개성군 송도면 면협의회원에 선출되었고, 1927년에는 관선 경기도 도평의회원에 임명되었다. 1928년 10월 22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