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음죽(陰竹). 자는 경서(景瑞).
임진왜란 때 차비역관(差備譯官)으로 조선과 명나라, 명나라와 일본의 외교담판에 많은 활약을 하였고, 1604년(선조 37) 요동(遼東)의 주민인 손득춘(孫得春) 등이 의주의 난자도(蘭子島)·체자도(替子島)를 무단으로 경작하자 3차에 걸쳐 명나라를 내왕하면서 사건의 마무리를 지었다.
1609년(광해군 1) 도제조(都提調) 이덕형(李德馨)에 의하여 사역원 담당역관인 훈상(訓上)으로 임용되어 당상관이 되자, 사간원에서는 박인상이 교회(敎誨: 잘 가르쳐 잘못을 뉘우치게 함)를 거치지 않았다 하여 쟁론하였다.
이때 이덕형은 이 사람의 재주는 화실(華實: 형식과 실질을 갖춤)하여 그 직책에 합당할 뿐만 아니라 만약 앞으로 이 사람과 같은 인물이 있다면 이번 일을 예로 하여 역시 등용하여야 할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1617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