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양이(養而). 할아버지는 부정(副正) 박유경(朴裕慶)이고, 아버지는 박채(朴綵)이며, 어머니는 장경안(張景安)의 딸이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고, 1606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홍문관의 수찬(修撰)·부교리(副校理),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등을 역임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이조좌랑을 거쳐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갔고 같은 해에 문신정시(文臣庭試)에 급제하여 겸문학(兼文學)·이조정랑에 올랐다.
1616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검상에 이어 문신중시(文臣重試)에 을과로 급제한 뒤, 의정부의 사인(舍人), 지제교(知製敎),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을 거쳐 1617년 홍문관의 전한(典翰)·직제학(直提學), 우부승지를 역임하였다.
당시 만주족의 흥기와 명나라 쇠퇴라는 북방정세의 변동에 따라 군적(軍籍)의 정비와 군역(軍役)의 폐단 시정을 논하였고, 1618년 성절사 겸 진주사(聖節使兼陳奏使), 그리고 동지부사(冬至副使)까지 겸하여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대사성과 동지의금부사를 겸하고 홍문관부제학에 이르렀다.
1620년 대사성·공조참판을 역임하고, 1622년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명나라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을 맞이하였다. 1623년 병조참판으로 재직 중 인조반정을 만나 폐모(廢母)에 앞장선 죄목 등으로 주살(誅殺)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