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후(子厚). 박여헌(朴黎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충생(朴忠生)이고, 아버지는 군수 박창(朴敞)이며, 어머니는 거창신씨(居昌愼氏)로 신임(愼恁)의 딸이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하였고, 이어 증광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종부시직장(宗簿寺直長), 세자시강원의 설서(說書)·사서(司書)를 지내고 1635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내고, 이듬해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이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의 길이 차단되어 강화도로 들어갔다.
당시 도원수(都元帥) 김자점(金自點)은 정방(井方)에, 황해감사(黃海監司) 이배원(李培元)은 장수(長壽)에 머무르면서 적을 공격하지 않았다. 분사(分司)의 대신들이 어사를 파견, 장수(將帥)들을 독려하여 남한산성으로 와서 돕게 하였으나, 모두 두려워 피하자 분연히 장수산성에 찾아가 군사를 독려하여 적과 싸웠다.
1638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과 검토관을 거치면서 병자호란 이후의 논공행상이 그르게 행하여지는 것을 거론하여, 공이 없는 자가 상을 받고 죄 있는 자가 벌받지 않는 사실을 통박하였다.
그 뒤 전라도도사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고 1640년 홍문관의 수찬·교리(校理), 1641년 이후에는 사간원의 정언·헌납(獻納),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당시 조정의 논의가 뜻에 맞지 않자 자청하여 전라도 김제군수로 나아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