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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 / 서울올림픽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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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
개념
두 팀이 네트를 사이에 두고 공이 떨어지지 않게 손으로 쳐서 상대편 코트 안에 떨어지게 하는 경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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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두 팀이 네트를 사이에 두고 공이 떨어지지 않게 손으로 쳐서 상대편 코트 안에 떨어지게 하는 경기.
내용

기술이 간단하고 신체적 접촉 없이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어 여가운동으로서도 적합하다.

한 팀이 6명으로 구성된 국제식과 9명으로 구성된 극동식의 두 가지 방식이 있으며, 1966년 아시아배구선수권대회 이후부터 공식경기에서는 6인제만 실시하고 있다.

코트 넓이는 남녀 다같이 18×9m로 되어 있으며, 코트 주위 7m 이내에는 어떠한 장애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코트에 그려진 모든 선의 폭은 5㎝로 되어 있고, 네트의 높이는 남자 일반의 경우 2.43m, 여자 일반의 경우 2.24m, 남자 고등부 2.35m, 여자 고등부 2.15m, 남자 중등부 2.20m, 여자 중등부 2.05m가 유지되어야 한다.

사용되는 공은 둘레는 6567㎝, 무게 260280g이며, 실내에서는 밝은 색깔의 공이어야 한다. 경기자의 복장은 각 팀이 동일한 색깔이어야 하고, 뒷굽이 없는 가벼운 신발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배구의 기술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서버가 공을 상대방 코트에 넣는 서브, 상대편 공을 받는 리시브, 자기편에게 단순히 공을 보내는 패스, 자기편에게 넘겨주어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여주는 토스, 토스된 공을 상대편 코트에 때려 넣는 스파이크, 상대편 공격을 전위선에서 저지하는 블로킹의 기술을 들 수 있다.

배구 경기를 할 때 심판은 경기 시작 5분 전에 각 팀 주장을 불러 토스를 시켜 서브권과 코트를 선택하도록 하고 선수를 정렬시켜 3분의 공식연습시간을 준 뒤 경기를 개시한다. 경기방법은 상대편이 서브한 공을 땅에 닿지 않도록 해서 세 번만에 공을 다시 네트 위로 넘겨 상대편을 공격하게 된다.

서브권을 가지고 있는 팀의 서브가 성공하거나 공격이 성공하면 1점 득점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서브권을 상대편에게 넘겨준다. 경기 중 1점 득점이 되거나 상대편에게 서브권이 넘어가게 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① 볼이 자기 코트 안의 땅에 닿았을 때, ② 한 팀이 계속해서 4회 이상 공을 다루었을 때, ③ 공을 손으로 잡았을 때, ④ 허리선 아래에서 공을 다루었을 때, ⑤ 선수가 서브 진행중 자기 위치에 있지 않았을 때, ⑥ 경기 진행중 네트를 만졌을 때, ⑦ 선수가 중앙선을 넘었을 때, ⑧ 네트 위로 손이 넘어갔을 때, ⑨ 백(back) 위치의 선수가 공격권에서 공격에 가담하였을 때, ⑩ 볼이 사이드마커 밖을 통과하였을 때, ⑪ 볼이 코트 밖의 물체나 땅에 닿았을 때 등이다.

경기는 최소 2점을 앞선 상태에서 먼저 25점을 획득한 팀이 승리한다. 만약 24-24로 동점을 이룬 경우, 경기는 2점 리드가 이뤄질 때까지 계속된다. 경기는 5세트 경기와 3세트 경기가 있으나 중요한 경기나 국제경기에서는 5세트 경기를 실시하게 되고, 5세트 경기에서는 먼저 3세트를 이긴 팀이 승자가 된다. 세트가 2-2로 동점인 경우, 최종 5세트는 최소 2점을 앞선 상태에서 15점제로 경기를 하게 된다.

배구는 1895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홀리요크(Holyoke)시의 기독교청년회(YMCA) 체육지도자인 모건(Morgan, W. G.)에 의하여 최초로 고안되었다. 그는 농구가 고령의 직장 근로자들에게 적절하지 못하여 그들에게 알맞은 운동을 모색하던 중, 테니스와 핸드볼에서 힌트를 얻어 실내에 6피트 6인치 높이의 테니스 네트를 설치하고 적당한 크기의 볼을 사용한 것이 최초의 배구경기였다.

이렇게 창안된 배구는 1896년 스프링필드(Springfield)체육대학에서 기독교청년회 체육부 이사회가 개최되었을 때 소개되어 많은 전문체육지도자들로부터 찬사와 호평을 받았다.

처음에는 이름을 ‘미노네트(minonette)’라고 불렀으나, 그 뒤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의 할스테드(Halstead, A. T.)가 볼을 발리(volley)하는 경기라는 뜻인 ‘발리볼’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1897년 피셔바사가 규칙을 정하고 1922년 기독교청년연맹 선수권대회가 공인되면서 1928년에 전미국배구연맹이 결성되어 미국에 배구가 보급되었다.

1946년에 국제배구연맹(IVBF)이 탄생되고 1949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제1회 세계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다. 그 뒤 배구가 올림픽종목으로 채택되기는 1964년 동경올림픽경기대회 때부터이다.

우리나라에 배구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15년 성서공회의 미국인 선교사 베이커가 입수한 규칙서를 이원용(李源容)이 번역해서 동료들과 함께 코트를 만들어 12인제 배구를 한 것이 시초이다. 1916년에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팀과 세브란스병원직원팀과의 경기가 세브란스병원 마당에서 최초의 공식시합으로서 거행되었다.

같은 해 3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의 반하트(Banhart)가 회원들에게 배구를 정식으로 지도하였으며, 1917년 3월 30일에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체육관에서 정식으로 경기를 가졌다. 이 경기에서는 기독청년회원과 서양인이 대결하였는데 기독청년회원이 3:0으로 이겼다.

그 뒤 1925년 10월 1일 조선신문사 주최 제1회 전조선배구대회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정에서 공인경기로 처음 행하여졌다. 같은 해 5월에는 조선신문사에서 당시 일본배구계의 권위자인 미키(三枝祐龍)를 초청하여 배구경기에 대한 강습회를 개최함으로써 배구가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또한, 1927년에는 우리나라 배구의 기술발전을 위하여 조선중앙가톨릭청년회에서 일본기독교청년회 체육부 간사이며 극동올림픽위원인 브라운(Brown)을 초청, 강습회를 개최함으로써 기술향상과 보급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뒤 점차 배구가 발전, 보급되어 1927년 제3회 조선신궁경기대회 때에는 남자배구가, 1931년 제7회 조선신궁경기대회에서는 여자배구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45년 11월 20일에는 조선배구협회가 발족되어 배구의 기술보급과 향상에 많은 공헌을 함에 따라 새로운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또한 광복과 더불어 부활된 전국체육대회(광복경축종합체육대회) 때부터 배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54년에는 우리나라 대표팀이 홍콩배구협회의 초청으로 원정경기를 가져 7전 3승 4패의 전적을 올림으로써 해외원정경기의 활로를 트게 하였다.

또한 1955년에는 제1회 아시아배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여 2위를 하였으며, 1958년 제3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6인제에 출전하여 남녀 모두 은메달을 획득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59년에는 국제배구연맹의 공식 회원국으로 가입함으로써 국제경기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우리의 실력을 세계에 과시할 수 있는 발판을 다지게 되었다.

1962년 제4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남녀 모두 6인제 경기에서 준우승을 하였으며, 1969년 12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3회 아시아청소년배구대회에서는 당시 세계 최강의 일본을 물리치고 남녀 모두 우승을 차지하였다.

올림픽의 전적을 보면, 1964년 동경대회에는 부진하였으나 1968년 멕시코대회에서는 여자 4위, 남자 7위의 전적으로 기반을 구축하였고,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는 여자팀이 동메달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또, 197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 남자팀은 우승, 여자팀은 준우승을 함으로써 일본과 자웅을 겨루고 있다. 최근까지도 우리나라의 배구는 국제적으로 실력을 과시하여,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에서 남자팀 2위, 여자팀 3위를 하였으며, 1996년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에서 남자 2위, 여자 2위를 하였고, 199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남녀 모두 2위를 하였다.

참고문헌

『파워배구』(채홍원, 형설출판사, 1982)
『배구』(서울대학교체육연구소, 삼화출판사, 1981)
『체육실기지도서』(이긍세 외, 동화출판사, 1979)
「배구」(이긍세,『스포츠씨리즈』5, 동양문화사, 1982)
「배구」(서울신문사 출판국, 『문교부체육교육자료총서』26, 1975)
Volleyball(Shondell, D. S. and Mananamas, J. L. M., New Jersey, Prentice·Hall,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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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정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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