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명은 무잠(武簪), 호적명은 백무동(白戊東). 경상북도 영천(永川) 출생.
어려서는 한문과 여학교 강의록으로 공부하였고, 뒤에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하였다. 영천공립보통학교 교원에 이어 자인공립보통학교(玆仁公立普通學校) 교원으로 근무하다 여성동우회(女性同友會)·여자청년동맹(女子靑年同盟) 등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이 탄로나 해임당하였다.
이 무렵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녀왔다. 1929년 『조선일보』에 박계화(朴啓華)라는 필명으로 「나의 어머니」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듬해에 도일,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적을 두었다. 1932년에 귀국한 뒤 결혼했으나, 이혼하였다. 1934년 경부터 창작에 전념하여 적지않은 수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러시아 국경을 넘나드는 한국인의 비극적인 모습을 그린「꺼래이」(1934)와, 가난하기 그지없는 두 며느리, 특히 맏며느리의 출산을 위해 동분서주하는‘매촌댁 늙은이’의 애환을 그린 「적빈(赤貧)」(1934)이 그녀 나름의 여성 리얼리즘을 확보한 작품들인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1938년 중국 상해(上海)로 여행가기도 했으나 이듬해에 위장병의 악화로 작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