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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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의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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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진찰하고 치료하기 위하여 설치한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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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환자를 진찰하고 치료하기 위하여 설치한 장소.
내용

법적으로는 입원환자 2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기관을 병원이라 하고, 이에 미치지 못하는 기관을 의원(醫院)이라 하여 구분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병원은 그 기능면에서 볼 때 20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난 사회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빈곤자를 수용하고 의지할 곳 없는 유랑인들을 보호하며 나병환자들을 치료 수용해온 과거를 되돌아보면 수백 년 내지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지만 오늘날과 같이 일반 환자를 본격적으로 근대적 병원에서 진료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이러한 근대적 병원의 발달은 의료기술의 개발과 함께 나타난다. 19세기 후반부터 임상검사실이 설치되고 엑스레이(X · Ray) 사용이 늘어나고 환자 마취가 더욱 보편화됨에 따라 근대적인 병원의 효용성이 높아지고 점차 진단과 치료활동이 병원을 중심으로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19세기 후반부터 과학적 의학과 기술의 개발이 촉진되자 병원에 대한 합리적 활용이 늘어나고 정부의 관심도 높아졌다.

이에 따라 병원은 빈부의 차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되고 지역사회와 국가에 공헌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이후 더욱 가속화되어 조직의료 경향의 대두와 함께 새로운 사회적 기구로 등장되었다.

이와 같은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병원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우선 우리 나라에서는 일본과 수호조약이 성립된 지 1년 후 1877년에 부산에 생겨난 재생의원을 손꼽을 수 있으며, 그 뒤 갑신정변이 있었던 1884년(고종 21)을 계기로 알렌(Allen, H. N.)에 의하여 1885년 4월에 문을 연 제중원(濟衆院)을 들 수 있고, 그 뒤 1899년에 정부에 의하여 설립된 내부병원과 대한의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와 같이 서양의학은 일본인들에 의하여 항구를 중심으로 부산 · 인천 · 원산 등지에 병원이 설립됨으로써 우리 나라에 도입되었고, 미국 북장로교파의 선교사이며 의사였던 알렌에 의하여 설립된 왕립병원으로부터 근대적 병원이 개설되기 시작하였다. 이 제중원은 1895년에 왕실의 경영에서 벗어나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로 그 사업이 이관되어 계속 운영되었다.

또한 1899년에는 정부에 의하여 내부병원이 설립되었으며, 서양의료와 한방의료가 다 같이 겸행되었다. 이 내부병원은 그 뒤 광제원과 대한의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1909년에는 <자혜의원 관제>가 반포되어 전주 · 제주 · 함흥의 3개 소에 자혜의원이 설치되고 주로 빈곤자의 구료에 힘쓰게 되었다. 1년 후인 1910년에는 수원 · 공주 · 광주 · 대구 · 진주 · 해주 · 춘천 · 평양 · 의주 등지에 자혜의원이 증설되어 병원사업이 확장되었다.

이 밖에도 대한적십자사가 창설되면서 1909년에는 적십자정신에 의한 의료기관으로 대한적십자사병원이 새롭게 건립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의 병원은 주로 일본과 미국을 통하여 소개되었으며, 당시 일본은 한일관계의 정치적 영향에 힘입어 주로 의학교육과 위생시설 등의 소개와 개혁에 역점을 두었다. 한편 미국은 왕립병원과 제중원 및 세브란스병원을 중심으로 의료사업의 일환으로 각 지방에 의료시설을 확장하였고, 이에 따라 병원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의 병원 내지 의료사업은 기독교 개신파들의 전도 의료사업이 중추가 되어 1904년에 근대적인 병원으로 면모를 갖춘 세브란스병원의 발전과 더불어 성장되어 초기에는 주로 가난한 환자들의 치료에 힘썼으며 그 이후에는 전염병환자와 부인 및 어린이의 질병 진료에 힘썼다. 이리하여 서울을 비롯한 인천 · 개성 · 공주 · 청주 · 부산 · 진주 · 대구 · 안동 · 춘천 · 해주 · 평양 등지에서 의료사업이 전개되고 나병원 및 요양소가 설치되어 근대적 의료시설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각 시 · 도 립병원과 대학병원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 뒤 1958년에는 국립의료원이 개원되었다. 1981년에 이르자 전국의 병원수는 315개로 늘어났다. 이 중 3분의 2가 비공공기관에서 운영하고 있는 일반병원이며 특수병원인 정신병원 · 결핵병원 · 나병원 등은 대부분이 국공립병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특수병원은 어느 나라에서나 공공기관에 의하여 운영되는 경우가 많으며, 우리 나라도 거의 대부분이 공공기관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다. 국립병원 중 비중이 큰 것으로는 나병원 · 결핵병원, 그리고 정신병원을 들 수 있다. 근대적 병원의 성장과정을 더욱 구체적으로 훑어보면 다음과 같다.

1884년 12월 4일에 서울 안국동에서 우정국이 신축되자 당시 개화파에 소속되었던 우정국 총판(總辦) 홍영식(洪英植)은 고관들과 각국의 공사들을 초청하여 축하연을 베풀었다. 이날 밤 낙성연이 거의 끝날 무렵에 이웃집에 불을 지르니 당시 금위대장이었던 민영익(閔泳翊)이 우영사(右營使)와 함께 불을 끄려고 나가던 중 숨어 있던 자객들에 의하여 습격을 당하자 많은 사람들이 놀라서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이 축하연에 참석했던 외무협판(外務協辦)인 독일인 묄렌도르프(Mollendorff, P.G.von, 穆麟德)는 민영익을 독일공사관으로 데려갔으며, 이미 1884년 9월 20일에 미국 북장로교회의 선교의사로 청나라를 통하여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있었던 알렌으로 하여금 치료하게 하였다. 상처가 완쾌되자 알렌은 왕실의 전의(典醫)가 되었다.

알렌의 건의에 따라 우리 나라 정부는 근대적 병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885년 4월 10일에 혜민원과 활인원을 혁파하고 서울 재동에 왕립병원인 광혜원(House of Extended Grace)을 설치하였다. 이 병원의 건물로는 이윤용(李允用)의 주택을 사용했으며, 소요되는 약품과 의료기계는 국비로 미국에서 구입하여 썼다.

그리고 2주일 후에는 그 이름을 제중원(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이라고 개칭하였다. 그 뒤 이 병원은 알렌 혼자만으로는 업무를 담당할 수 없어서 2명의 선교의사와 여의사의 파견을 받아 운영되었다. 이 왕립제중원은 1887년에 환자수가 늘어나자 홍영식의 주택으로 옮겨 서울 남부 동현(銅峴:지금의 을지로)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 왕립병원은 그 뒤 정부의 재정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운영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에비슨(Avison, O.R., 魚丕信)이 1893년 7월에 도착하여 제중원의 운영을 도왔다.

그러나 1894년 5월에 이르자 청일전쟁과 정부의 재정형편으로 미루어 제중원의 사업을 계속하기 어려워지자 정부는 관제를 바꾸어 제중원의 경영을 미국 북장로교파 선교회에 이관하게 되었다. 그 뒤 1899년부터 제중원 의학교가 설립되고 1908년 6월에 제1회 졸업생 7명을 냈는데 이것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인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학교의 시초였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는 왕립병원인 광혜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제중원의 시대를 거쳐 1904년 9월 3일부터 세브란스병원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선교의료활동은 비단 제중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많은 개신파 교회에서는 선교의사를 파견하여 인천 · 개성 · 공주 · 청주 · 광주 · 군산 · 전주 · 부산 · 안동 · 춘천 · 평양 · 선천 · 강개 · 원산 · 함흥 · 성진 등지에 진료소 및 병원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1885년에 왕립 광혜원이 개설되고 제중원으로 바뀌었으나 1894년 5월에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그 해 6월 22일에 갑오개혁에 의한 관제 변화에 따라 그 해 7월부터 제중원의 운영이 미국 북장로교회에 이관되었으나 그 뒤 1899년 4월 26일에 칙령 제14호로 정부의 내부직할병원의 설립이 반포되고 그 해 5월 12일에는 내부령(內部令) 제16호로 병원세칙이 공포되었다.

이 병원은 일반환자를 진료하는 외에도 죄수들의 구료사업과 전염병환자 수용을 위한 피병원(避病院) 설치 등의 규정이 세칙에 명시되었다. 이듬해 1890년 6월 30일에 칙령 제24호로 내부병원은 광제원으로 개정되었으며, 광제원은 한약소(漢藥所) · 양약소(洋藥所) 운영과 질병구료 및 종두업무(種痘業務)를 관장하게 되었다.

결국 내부직할병원과 광제원에서는 서양의료는 물론 한방의료가 병행되게 되었으며, 1907년에는 또다시 칙령 제9호로 의정부 직할로서 <대한의원관제 大韓醫院官制>가 공포되어 광제원의 업무를 인계하고 교육부와 위생부가 증설되어, 치료부에서는 질병구료와 질병시료를 담당하고 교육부에서는 의사 · 약제사 · 산파, 그리고 간호부를 양성하고 의학교과서 편찬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위생부에서는 의사 · 약제사 · 산파, 그리고 약품매약취체에 관한 조사를 담당하고 전염병과 지방병의 예방, 종두 기타 공중보건에 관한 조사를 실시하며 검역업무를 관장하고 지방의료기관에 대한 조사도 관장했다. 그런데 대한의원위생부는 내부위생국의 1분소로서 위생시험소로 발전되었다.

1909년 8월 21일에 칙령 제75호로 <자혜의원관제>가 공포되었다. 이 의원은 내부대신의 관할 아래서 운영되었으며 주로 극빈자의 질병을 구료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관제의 반포와 함께 제1차로 전라북도 전주군과 충청북도 청주시 그리고 함경남도 함흥군의 3개 지방에 자혜의원이 설립되었다.

이듬해 7월 22일에는 관제가 개정되어 10개 지방에도 자혜의원이 증설되어 수원 · 공주 · 광주 · 대구 · 진주 · 해주 · 춘천 · 평양 · 의성 · 경성에 자혜의원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1909년부터 유행하게 된 콜레라환자를 수용하기 위한 피병원이 생겨나 서울 인왕산 아래 설치되어 순화병원(順化病院)으로 발전되었으며, 자혜의원은 그 뒤 시 · 도립병원으로 발전되었다.

대한적십자사는 1905년에 병원을 개설하였으나 1909년 7월 28일에 <한국적십자사관제>가 폐지되고 일본적십자사로 합병됨으로써 대한적십자사의 명칭은 없어졌으나 일본적십자사 한국본부 소속 병원으로 존속되어 오늘날의 대한적십자사병원이 되었다.

이상의 발전과정을 보건대, 우리 나라는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근대적 병원의 발전과 아울러 1907년 대한의원의 발족과 함께 늘어나기 시작한 관립병원과 자혜의원 및 피병원으로 시작된 순화병원을 주축으로 관립병원이 발전되어 왔음을 엿볼 수 있다. 그 뒤 1945년 이후 우리나라 병원은 자주적인 입장에서 발전되어 오늘날에 와서는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1999년 현재 전국 병원 수는 4만 253개, 총 병상수는 25만 9,062개에 이른다.

참고문헌

『한국의학사』(김두종, 탐구당,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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