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이(李)씨이며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근대 불교계에서의 활동이 일부 전하며 명진학교(明進學校, 동국대학교의 전신)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특히 서울봉원사(奉元寺) 강원에서 수학할 때 이동인(李東仁)에게서 개화사상을 전수받은 사실이 확인되는데, 이는 훗날 그가 신학문의 수용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화계사(華溪寺)의 홍월초(洪月初) 등과 함께 한국 불교의 근대화를 도모하던 그는 일본 정토종(淨土宗)이 한국 불교의 전통과 흡사하다는 이유를 들어 이와 제휴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그 결과 당시 한국에 와 있던 정토종 개교사(開敎使) 이노우에 겐신(井上玄眞)의 권유로 불교연구회(佛敎硏究會)를 조직하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근대식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1906년 2월 5일 내부(內部)에 올린 불교연구회 설립 청원서는 같은 해 2월 19일 인가가 났으며, 홍월초가 초대 회장이 되어 보통학교 설립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입학생의 수준과 교과목 내용이 이미 고등교육기관 수준에 이르고 있었기에 명진학교라는 교명으로 학부(學部)의 승인을 취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담은 1906년 4월 10일 개최된 불교연구회 모임에서 제2대 회장과 명진학교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불교연구회는 한국 불교의 종지(宗旨)를 정토종으로 삼은 점에 대해 불교계에서 심한 비판을 받았고, 명진학교의 운영권도 원종(圓宗)으로 넘겨졌는데 그 역시 이 과정에서 회장과 교장의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1914년 11월 각황사(覺皇寺)에서 불교진흥회가 설립되자 간사 28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으며, 1920년 1월에는 해주 심원사(心源寺)의 주지로 취임하였다.
한때 성불사(成佛寺) 주지를 지내다가 1928년 12월 승려대회 준비위원회에서 지방선전부에 속해 활동하였다. 이후 교무원 평의원과 화엄사 주석 사실이 확인되지만 입적까지의 자세한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