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여름부터 김동식(金東植)·백운기(白雲起)·박초식(朴楚植)·김중량(金仲亮) 등이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고관동(古館洞)의 동암산(東巖山)을 근거지로 이 단체를 조직하자, 많은 동지들이 모여들었다.
간부들은 화승총 등을 준비하고 300여 명의 애국청년들을 훈련시켜 의주·용천(龍川)·선천(宣川) 등지로 파견, 일제기관을 파괴하고 관헌을 암살하며 친일분자를 숙청하였다.
또한 남만주의 독립운동단체와도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다. 이러한 활동에 대응해 일제는 8, 9월에 걸쳐 삼엄한 경계망을 펴고 수색작업을 폈는데, 이 기간에도 여러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화력이 우세한 적과의 정면 충돌을 피해 본부를 선천에 이어 압록강 건너편으로 옮겼다. 그 해 9월 선천군 산면(山面) 내산사(內山寺) 주둔지에서 수백 명의 일본군과 격전하였다. 이 때 한만종(韓萬宗)이 전사하고 김중량이 중상을 입었으며, 많은 단원이 붙잡혔다. 일본군 역시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그 해 10월 본부를 압록강 건너 남만주로 옮기던 중, 안동현 부근에서 일제에게 매수된 중국군과 일제합동부대의 공격을 받았다. 10여 시간의 격전 끝에 쌍방 모두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압록강 하류 접리수(接梨樹) 부근에서도 일본 경찰과 접전하였다. 그 뒤 관전현(寬甸縣)으로 들어가 군세를 수습한 뒤 대한독립단의 전투부대와 합류하였다.
그 해 12월에는 김도원(金道源)·이광세(李光世) 등이 이종형(李鍾滎, 일명 權秀貞)·조상백(曺相伯) 등과 악질 친일밀정을 처단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그러던 중 약속한 군자금을 받으려고 서울 종로구 운니동(雲泥洞)변석연(邊錫淵)의 집을 찾아갔다가 대기중이던 종로경찰서원에게 붙잡혔다.
이어 본단의 중견인물 22명도 붙잡혔다. 1922년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광복군총영 등이 통합하여 대한통군부를 결성할 때 이에 편입되었다. →대한통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