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봉인사(奉印寺)의 속암(屬庵)이었다고 한다. 「탑법당이건기문(塔法堂移建記文)」에 의하면, 봉인사에서는 1619년(광해군 11)에 석가법인(釋迦法印)을 봉안(奉安)한 법인탑을 세웠는데, 이를 수호하기 위하여 초창된 사찰이 봉인사이고 이와 동시에 개창한 것이 부도암이 아닌 가 추측되고 있다. 그 뒤 1854년(철종 5)에 혜암(慧庵)이 중수하고, 1864년(고종 1)에 혜암과 환옹(幻翁)이 탑과 법당을 창건하였다.
1925년에는 주지 동파(東坡)가 신도들의 시주로 중수하였다. 1928년에는 이씨 왕가에서 나라를 위하여 치성(致誠)하라는 뜻으로 봉인사에 향촉(香燭)을 하사하였는데, 사승(寺僧)들이 황촉등(黃燭燈)을 법당 중앙에 달고 밤을 새우다가 불이 나 20여 칸의 대법당과 응진전(應眞殿)·시왕전(十王殿), 기타 동산(動産)까지 모조리 불타고 큰방과 노전(爐殿) 두 동만 남게 되었다.
그 뒤 왕가에서는 금곡(金谷)에다 홍릉(洪陵)을 만들기로 하였는데, 이때 절 아래 동네에 사는 이천응(李天應)이 폐사가 되다시피 한 이 절의 건물을 헐어 홍릉전각(洪陵殿閣) 용도로 매각하고, 또 절의 땅과 산림 전부를 자기의 소유로 하였다.
그리고 부도탑(浮屠塔)도 1860년경에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에 거주하는 전(前)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의 차남 호영(琥榮)이 당시 견성암(見聖庵)의 승 환송(喚松)과 공모하여 사리장치(舍利藏置) 등을 꺼내어 매각함으로써 훼손되고 말았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윤행순(尹行醇)이 쓰고 조윤형(曺允亨)이 새긴 풍암대사부도비(楓巖大師浮屠碑)가 있었으며, 또 금종(金鐘)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원래 강원도 김화(金化)의 수태사(水泰寺)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